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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Apr 22. 2022

딱 하루, 파리를 여행한다면

낡은 미술관, 새 미술관 그리고

“당신은 도시파? 시골파?”

이렇게 여행 취향을 묻는다면 “단연코 시골파!”라고 답한다. 1000만 명이 우글거리는 메가시티에 살고 있기에 일상 탈출 기회가 생기면 차 소리, 사람 소리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출장도 그랬다. 엿새 중 나흘을 남프랑스 시골 동네에서 보냈다. 행복했다. 그러나 파리를 피할 순 없었다. 코로나 시대, 세계 최대의 관광도시를 취재해야 했다. 주어진 시간은 딱 하루. 이 넓은 도시, 수천 겹의 매력을 가진 세상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막막했다. 오를리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 숙소로 향하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이튿날, 일찌감치 조식을 먹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낙엽이 뒹구는 튈르리 정원을 지나니 금세 박물관이었다. 평일 아침인데도 북새통이었다. ‘파리 뮤지엄 패스’를 손에 쥐고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긴 줄을 지나쳐 박물관 입구로 직행했다. 박물관 직원에게 패스를 내보였다.

“예약은 했니?”

“박물관 패스 있는데, 뭐하러.”

“그거 있어도 예약해야 해.”

“아, 그래? 예약 안 하고 들어가는 방법 없어?”

“없어. 오늘 예약 이미 끝났어.”

19세기 인상파 미술 작품이 많은 오르세 미술관.

파리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아무리 프랑스가 방역이 헐렁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인파로 박물관이 들끓을 줄 몰랐다. 그래도 박물관, 미술관을 안 볼 순 없었다. 내가 아무리 시골파여도 여긴 파리니까. 센강 건너편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오르세는 예약할 필요가 없었다. 15분 정도 줄 섰다가 입장했다. 역시 사람이 많았다. 가이드 맵을 봤다. 고흐, 고갱, 모네, 마네, 밀레. 내가 아는 유명 화가 작품이 다 여기 있었다. 그럼 루브르엔 뭐가 있는 거지?


미술관 분위기만 스케치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책에서나 봤던 19세기 작품을 대형 원본으로 가까이서 관찰하니 한 폭 한 폭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인물들의 오묘한 표정, 고흐의 ‘론강의 별밤’ 속 거친 붓의 질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2시간 반을 오르세에 머물렀다. 시간만 있었더라면 반나절은 있었을텐데. 이 작품을 실물 영접하고 시시하다, 뻔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으리라. 그림에서 작은 구원을 경험했다. 강상중 교수의 [구원의 미술관]에 나온 대로 “아름다움과 그림에 감동한다면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사람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것”이란 말을 실감했다.    

고흐의 '론강의 별밤'.

미술관 근처에서 태국 음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리고 골목을 배회하며 작은 갤러리, 서점을 구경했다. 그림을 사고 싶었다. 안 비싸면서 ‘갬성’은 있는(그런 게 어딨겠니?). 70~80년 전 무명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있었으나 끝내 사진 않았다. 오르세에서 너무 대작을 봐서인지 감흥이 없었다.


다음 코스는 몽마르트르 언덕. 너무 뻔한가. 어쩔 수 없었다. 세계 최대 관광도시의 명소를 스케치하는 게 미션이었으니까. 전철을 타고 블랑쉬 역에 내렸다. 파리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몽마르트르는 처음이었다. 어디로 갈지 몰랐다. 구글 맵을 보니 친절하게도 ‘몽마르뜨 언덕’이 나와 있었다. 지도만 믿고 걸었다. 한데 관광객 대부분이 다른 골목으로 가는 게 보였다. 골동품점에 들어가 ‘사람들 계단에 쫙 앉아 있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이란다. 가만 보니 가게에 그림이 많았다. ‘삘’이 강하게 오진 않았어도 녹색 액자에 초록 물감으로 정원을 그린 그림이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그림 세 장을 50유로에 샀다. 성당 계단에 온갖 피부색의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버스킹 가수가 존 레넌의 ‘이매진’을 열창했다.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팁을 건넸다. 나도 같이 흥얼거렸다. 모두 이런 여행의 순간이 그리웠나 보다.

, 다음 ‘뻔할  코스는 에펠탑. 아이고 식상해라. 에펠탑은 밤에  들어올 때가 예쁜데 시간이  떴다.  미술관을 찾았다. 이번에는 파리에서도 가장 핫한 ‘신상미술관이다. 구찌 회장이 만든 미술관 ‘피노 컬렉션’. 역시나 대기줄이 엄청났다. 의외로 무인발권기 쪽은 줄이 . 티켓을 끊고 입구로 갔다. 박물관 직원이  티켓을 보더니 오늘이 아니라 다음  관람권이란다. . 다리가 풀렸다. 어쩐지 예약이 나무 쉽더라니.


여기도 매진이었다. 혹시나 하고 직원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다. 파리 취재를 왔는데 들여보내 줄 수 있을까. 짠내 나는 표정을 장착하려고 하는데 냉큼 ‘물론!’이라고 말했다. 기자증 보여줬더니 바로 입장. 한국에서 기자는 동네북 신세지만 세계적인 박물관, 미술관은 이렇듯 기자에게 우호적이다.

지난해 개장한 미술관 피노 컬렉션. 구찌 회장이 사재를 털어 만든 미술관이다. 설계는 안도 다다오 작품.

오르세에서 못 본 현대미술을 감상한 것도 좋았지만 피노 컬렉션은 미술관 자체가 작품이었다.  프랑스에서 네 번째 부자인 프랑수아 피노는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미술관 설계를 맡겼다. 옛 증권거래소 건물 중앙에 지름 30m, 높이 10m의 원형 벽을 세워 ‘건물 속 건물’을 구현했다. 회색 시멘트 벽에서 안도 아저씨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무인발권기에서 잘못 산 티켓은 내가 묵은 호텔 컨시어지 직원에게 건넸다. 환불이 안 된다길래, 누굴 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늘 밝은 인상으로 맞아주던 호텔 직원이 생각났다. 기뻐하는 그의 표정을 보니 흐뭇했다. 평소엔 발동하지 않는 작은 선심을 베풀 수 있는 것, 여행이 주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어둑해질 무렵 에펠탑에 도착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사람들이 에펠탑으로 모여들었다. 과연 에펠탑은 낭만과 환상의 장소였다. 센강 주변에선 많은 연인이 입을 맞췄고, 에펠탑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미 2만 보 이상 걸은 터라 다리에 힘이 빠지고 기운이 없었으나 설렘과 흥분으로 들뜬 저들을 보니 괜히 내 마음도 벅찼다.


오후 8시, 에펠탑이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이자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모두 마법에 홀린 표정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아저씨는 “바로 이 장면을 보기 위해 파리에 왔다”며 가족끼리 와인 잔을 부딪쳤다. 헤밍웨이의 책 제목이 떠올랐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흠 이 도시, 꽤 낭만적이군. 시린 밤바람 때문일까, 눈부신 에펠탑 때문일까. 괜히 눈이 시큰해졌다. 시골파 아저씨, 왜 이러세요? 세상 뻔한 코스만 둘러봐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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