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형 공공미술부터 철길숲까지
출렁다리, 스카이워크 전망대, 케이블카.
웬만하면 피하는 여행기사 3대 아이템이다. 환경 훼손, 후진 미감, 지역 관광 획일화 등 기피 이유가 차고 넘친다. 한데 마감은 다가오고 마땅한 취재 아이템이 없을 때는 덥석 물 수밖에 없다. 적당히 관심을 끌기 좋고 인터넷 기사 클릭도 잘 나오기 때문이다. 포항에도 출렁다리와 전망대를 결합한 듯한 구조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단 외면했지만 결국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아이템 고갈, SNS 명소 검색, 출장 다녀와서 기사 작성. 그리고 클릭이 잘 나오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하기. 어떻게 맨날 뜻 깊고, 피시한 글만 쓸 수 있겠냐며.
지난 3월 포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환호공원이었다. 바닷가 언덕에 자리한 주민 쉼터였는데 지난해 기괴한 철제 구조물이 들어선 뒤 단박에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스페이스 워크’ 이야기다. 롤러코스터를 닮은 이 구조물은 포항이 자랑하는 기업 포스코가 만들었다. 독일의 유명 예술가 부부에게 디자인을 맡겨 2년 7개월만에 완성했다. 포스코는 디자이너와 건축 기간, 튼튼한 내진 설계 등을 내세우며 단순한 관광시설이 아니라 ‘체험형 공공미술’이라고 강조한다.
총 트랙 길이는 333m, 최대 높이는 25m. 공공미술품치고 꽤나 무섭다. 청룡열차도 아닌데 막상 올라서면 오금이 저린다. 지레 겁먹고 못 오르겠다는 사람도 많다. 촬영 때문에 여러 시간대에 방문했는데 이왕이면 일몰 시간을 맞추는 게 좋겠다. 포항시내 쪽으로 떨어지는 해를 보고 난 뒤 사위가 어두워지길 조금 더 기다려보자. 조명이 들어온 스페이스 워크가 우주 정거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역시 돈이 무섭군.” 스페이스 워크를 둘러본 뒤 자동으로 이 말이 나왔다. 비슷한 모양에 길이만 점점 길어지는 전국의 출렁다리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만듦새, 디자인, 스토리텔링 등 여러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딱히 돈을 많이 쓴 것도 아니었다. 기업이 자존심을 걸고 만든 작품이었기에 지자체가 만든 판박이 구조물과 다를 수밖에. 그냥 돈의 힘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총체적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포항에는 스페이스 워크 말고도 걷는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곳이 많다. 먼저 조심해서 발음해야 하는 ‘이가리닻전망대’. 청하면 이가리에 있는 닻 모양의 해상 전망대다. 길이는 102m로 길진 않은데 주변 바다가 맑은 에메랄드빛이어서 ‘물멍’하기에 좋다. 여름에 이 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해보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호미 반도 해안 둘레길도 근사하다. 인적이 뜸해서 좋다. 4개 코스 중 2코스 ‘선바위길’을 걸어봤다. 몽돌해변과 포장도로, 해상탐방로가 두루 섞여 심심하지 않았다. 1억5000만 년 전 이 일대에서 화산 활동이 있었단다. 하얀 바위가 우뚝 솟은 ‘힌디기’를 비롯해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을 봤다. 크기가 아담할 뿐 호주의 그레이트 오션 로드 못지않은 절경이었다. 그렇다고 포항시에서 ‘한국의 그레이트 오션 로드’라고 홍보하는 건 참아주시길.
최근에 포항 시내 한복판에 조성한 ‘철길숲’도 재미난 길이다. 서울 경의선 숲길처럼 철길을 활용해 만든 산책로다. 도심을 가르는 철로가 한 세기 이상 포항과 부산을 연결했는데, 2015년 포항역이 북구 흥해읍으로 이전하면서 철로도 쓸모없어졌다. 기차가 안 다니는 철로는 무단 경작, 쓰레기 투기, 비행 청소년의 탈선 장소로 몸살을 앓았다. 전문가와 시민이 머리를 맞대 철길을 걷기 좋은 숲으로 만들기로 했다. 구 효자역에서 구 포항역까지 6.6㎞에 이르는 철길숲을 조성해 2018년 5월 개방했다. 20만 그루가 넘는 수목을 심고 곳곳에 광장을 마련하고 설치 미술품도 전시했다. ‘불의 정원’처럼 흥미로운 볼거리도 있다. 공사 중 철로에서 천연가스가 분출하는 걸 확인했으나 자원으로 쓸 정도는 아니어서 24시간 꺼지지 않도록 해뒀단다.
직접 걸어보니 포항시민이 질투 날 정도로 근사한 산책로였다.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았다. 청계천이나 한강 공원보다 주거지와 밀착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숲 주변에 근사한 카페와 레스토랑도 많았다. 평일 낮인데도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어른, 달리는 젊은이가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 좋았다. 관광객을 겨냥한 이색 체험 시설이 아니라 주민이 언제든 부담 없이 걷고, 어쩌다 찾아온 관광객도 일상의 호흡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도시에는 이런 숲이, 이런 산책로가 더 많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