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와 둘레길, 산책의 천국 '고창'
“가본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직업 때문인지 이 질문을 유독 많이 받는다. “그런 거 없어요”라고 쿨한 척할 때도 있고 매번 달리 답하기도 한다. 그리스였다가 하와이였다가 에스토니아였다가. 치앙마이와 발리도 늘 떠오른다. 근데 마음에 든 여행지 순위를 매긴다는 게 어불성설인 것 같다. 여행 중 좋았던 순간순간이 기억 속에서 반짝일 뿐 거기에 우열은 없으니까. 이보다 좀 진지한 고민으로 이끄는 질문이 있다. “가본 곳 중에 살아보고 싶은 동네가 있나요?”
지방 출장을 다니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아, 이 동네 살아보고 싶다. 강원도에 넷, 경북에 하나, 전북에 둘, 전남에 둘 정도 그런 동네가 있다(뭐 이리 많냐). 그중 한 도시를 최근에 다녀왔다. 이제 그만 실명을 까자. 바로 전북 고창이다.
고창에서 제일 유명한 관광지는 선운산, 선운사다. 나도 몇 해 전, 처음 찾은 고창에서 선운사부터 가봤다. 그리고 고창읍성 앞마당에서 패션 브랜드 ‘에피그램’ 행사를 구경했다. 선운사 단풍도 멋졌고 고창읍성의 성벽도 근사했지만 무엇보다 산책하기 좋은 도시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선운사도 고창읍성도 걷기 좋았다. 차를 타고 고창을 돌아다니며 마주한 풍경도 푸근하고 넉넉했다. 그러고 보니 고창에는 높은 산이 없다. 도립공원인 선운산은 336m에 불과하고 가장 높다는 방장산도 743m 수준이다. 크고 높은 산이 지키는 도시도 나름의 멋이 있지만 위압감 없는 높이의 산이 수굿하게 펼쳐진 동네는 왠지 정겹다.
지난 5월 학원농장 청보리밭과 운곡습지, 하전마을 갯벌을 차례로 들렀다. 보리밭이야 너무 유명하고 이미 누렇게 익어서 수확기에 접어들었으니 패스. 이번 취재의 주인공은 운곡습지였다. 지난해 말 유엔 세계관광기구(UNWTO)가 ‘최우수 관광마을’로 신안 퍼플섬과 함께 고창 운곡습지-고인돌마을을 선정했다. 퍼플섬은 후배가 취재했고 고창은 내가 가려했는데 겨울엔 딱히 볼 게 없다 해서 나중으로 미뤘다. 그리고 신록이 춤추는 5월 습지를 찾았다.
습지를 좋아한다. 물에 사는 생명들이 품고 있는 특유의 생기를 좋아한다. 물을 머금은 땅을 바라보며, 거기 깃들어 사는 온갖 동식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면 그 생명력이 스펀지처럼 내게도 전해진다. 역동하는 바다를 바라볼 때와 달리 차분하고 깊은 기운 같은 게 스며온다. 그래서 우포늪이나 곡성 침실습지 같은 곳을 다녀오면 무력감이 사그라들고 생체리듬이 살아난다. 사진 찍는 입장에서도 습지는 무척 멋진 곳이다. 푸릇푸릇한 생기가 느껴질뿐더러 습지에는 새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철새가 모여드는 초겨울 우포늪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한데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운곡습지는 딱히 멋진 사진이 보이지 않았다. 람사르습지로 등록됐고 유엔이 인정한 관광마을이라면 사진 좀 찍는다는 사람이 몰려갔을 텐데 말이다. 그 이유를 가보고서야 알았다. 운곡습지는 사진발보다 사연이 남다른 곳이었다. 큼직한 저수지와 고창군이 조성한 생태공원도 있는데 하이라이트는 이런 곳이 아니다. 산 중턱, 우거진 숲에 자리한 ‘논 복원지’가 남다른 사연을 품고 있다.
고창에서는 8000만 년 전 화산이 터졌다. 그 영향으로 고인돌 만들기 좋은 돌이 많이 생겼다. 주변에 습지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물이 잘 빠지지 않는 화산암 덕에 곳곳에 습지가 생겼다. 습지는 농사짓기에 좋은 환경이어서 아득한 옛날부터 벼농사를 지었다. 변화가 찾아온 건 비교적 최근. 1982년 영광 한빛원전의 냉각수 용도로 운곡댐을 만들면서 농사짓던 156가구가 이주했다. 마을은 저수지에 잠겼고 벼농사짓던 땅은 방치됐다. 30년 뒤 놀라운 변화가 포착됐다. 버려진 땅이 스스로 원시 습지 상태로 되살아났다. 온갖 식물이 자라 숲을 이뤘고 황새·수달·담비 등 멸종위기 동물의 터전이 됐다.
운곡습지는 대충 지나치면 습지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물을 좋아하는 선버들이 30년 새 잔뜩 우거졌다. 숲의 바닥을 자세히 살펴야 곳곳에 고인 물과 사초·물별이끼 같은 습지식물이 보인다. 맑은 물에는 갓 부화한 올챙이가 한여름 해수욕장 피서객처럼 득시글하다. 원시 밀림 같은 이곳에서 1980년대 초까지 농사를 지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산지에 자리한 계단식 논이었어서 그냥 내버려 뒀다면 남해 다랭이논, 발리 우붓 같은 풍광은 볼 수 있었을 테다.
어쩌면 운곡습지가 우포늪이나 순천만처럼 포토제닉하지도, 관광객을 유혹하는 요소도 없어서 다행이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덕’에 손때가 덜 묻을 테니 말이다. 운곡습지 마을 주민도 유엔이 인정해준 건 고맙지만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있다. 어쨌거나 습지를 좋아하는 이라면 한두시간 산책하는 것만으로 벅찬 경험을 할 수 있다.
큰 기대가 없었던 운곡습지가 고창이 ‘살아보고 싶은 고장’ 리스트에 오르는 데 기여를 한 셈이다. 이번 방문 때 짬을 내 고창읍성도 한 바퀴 걸었는데 역시나 좋았다. 느긋하게 걸으니 딱 한 시간이었는데 만난 풍경은 퍽 다채로웠다. 성벽에 올라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부터 읍성 안쪽의 아름드리나무들, 빽빽한 대나무 군락까지. 싱그럽고 푸근했다.
몇몇 마음에 드는 스폿만 보고 그 도시가 살기 좋다고 단정하는 건 위험한 일일 테다. 고창에 정착한 타지 출신 작가를 만났는데 그도 비슷한 말을 했다. 고창이 좋아서 왔지만 사람들 틈에 녹아드는 건 간단치 않다고. 여기서 구태여 시골 사람들의 특성, 강고한 혈연 문화 같은 걸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최근 내가 살고 싶은 도시로 꼽는 경북 모 도시의 공무원을 최근 만났는데 그도 ‘환상을 깨라’며 뼈 때리는 현실론을 설파했다. 낙후한 인프라, 피곤한 인간관계 등등을 예로 들며.
맞다. 현실은 현실이다. 그리고 잠깐 뜨내기 여행객이 본 도시의 인상과 살면서 부대끼는 현실은 한국과 브라질의 거리만큼 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온갖 조언에 너무 기죽을 일도 아니다. 우선 내가 당장 떠날 것도 아니다. 탈서울(귀촌보단 이 말이 더 좋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아직 충분치 않다. 서울을 등질만큼 아주 절박한 상황도 아니고 생계 무책이기도 하다. 어쨌든 어딜 가든 개기고 비비며 살면 살아지지 않겠나. 이 각박한 도시에서도 지금까지 존버했는데. 그리고 어딜 가든 거기가 천국일 거란 천진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여행자로서 잠깐잠깐 천국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해 준 도시에 대한 환상만은 품고 살고 싶다. 그게 최근엔 고창이었던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