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석파령 MTB 도전기
서울 남산 자락에 이사 와서 한 가지 다짐한 게 있었다. 언젠가 나도 자전거를 타고 정상을 올라보리라. 일주일에 두세 번은 남산 산책을 가는데 그때마다 꾸역꾸역 산을 오르는 두바퀴족을 본다. 산동네에 사는 동안 산을 마음껏 누리고 싶은데 끝판왕이 자전거 등반이라고 생각했다. 로드 자전거와 MTB 중 뭐가 좋을지, 브랜드는 어떤 게 괜찮은지 진지하게 고민한 뒤 아내에게 말했다. 드디어 지를 때가 왔다고. 돌아온 답. 어, 안 돼. 당신 취미가 너무 많아. 제발 한두 가지에만 집중하셔. 자전거 둘 데도 없고. 아내의 단칼에 상처를 입진 않았다. 100% 맞는 말이니까. 달리기, 일렉기타, 겨울엔 스키, 외국 나가면 스쿠버다이빙… 그래, 더는 벌이면 안 된다.
그래도 MTB는 미련이 남았다.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고 싶었다. 따릉이 타고 동네 마실 다니거나 로드바이크로 한강을 질주하는 것 말고, 허벅지 터질 듯한 기분을 느끼며 산을 오르고 싶었다. 마침 취재 기회가 생겼고 마음껏 질주할 수 있는 호숫길과 초보자용 MTB 코스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춘천을 가기로 했다.
코스는 정했으니 다음 숙제. MTB를 빌려야 했다. 처음엔 영상 노출 조건으로 자전거 업체에 고급 모델을 빌릴까 했는데 성가셔서 포기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역시 내돈내산이 속 편하다. 춘천에 가서 빌리자니 자전거 상태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왕이면 기차에 자전거 싣고 가는 모습도 촬영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동네에서 빌리기로 했다. 인터넷 뒤져보니 집에서 멀지 않은 이태원에 자전거 대여점이 있었다.
아버지뻘 되시는 어르신이 운영하는 가게는 힙한 이태원과는 거리가 먼 복덕방 분위기였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자전거를 보유한 대여점은 서울에 없다고 사장님은 강조했다. 자전거를 고르고 헬멧도 빌렸는데 사장님은 핸드폰 거치대, 보조 튜브도 챙겨주셨다. 가방은 안 필요해? 물통은? 동네 주민이 반가우신지 다 내주실 판이다. 커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데 갑자기 외국인이 들어왔다. 사장님이 날 붙들었다. 가지 말고 있어 봐, 하시곤 나를 자연스럽게 통역요원으로 써먹으셨다. 네덜란드 청년은 며칠 뒤 아버지와 서울서 부산까지 국토종주를 한다며 자전거 두 대와 보조 용품을 빌렸다. 얼떨결에 어쭙잖은 영어로 헤매긴 했지만 재미난 경험이었다. 벌써 한 달여 전인데 네덜란드 부자는 무사히 국토종주를 했는지 궁금하다.
이튿날 자전거를 타고 용산역으로 가서 ITX-청춘 열차를 탔다. [자전거여행 바이블]을 쓴 이준휘 여행작가가 동행했다. 약 1시간만에 춘천역에 도착. 바로 자전거를 몰았다. 의암호 순환 자전거길. 이준휘 작가는 “전국 호수변에 자전거길이 많지만 이렇게 바로 물가에서 달릴 수 있는 곳은 드물다"고 말했다. 춘천시에서 길 관리를 잘해서인지 달리기 편했고 늦가을 의암호는 차분하고 안온했다. 중간중간 바닥이 유리로 된 다리 ‘스카이워크'부터 국내 최장 케이블카, 카누 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과연 팔방미인 자전거길이었다. 이 길 하나만 보고는 춘천시민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아이고 춘천의 겨울을 어떻게 견디나 싶었다.
강촌역에 도착. 본격 MTB 코스를 앞두고 짜장면을 흡입하며 연료를 채웠다. 목적지는 석파령. 돌을 깨뜨리며 나아가야 할 것 같은, 도전감을 일으키는 이름이다. 강촌역 인근에 당림마을이 있는데 자전거 동호인 사이에서 ‘당림리 임도'가 MTB 코스로 유명하다. 풀코스를 소화하면 약 20km 산길을 달려야 하고, 해발 600m까지 올라야 하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 길 일부가 폐쇄된 상태였다. 그 덕에 석파령(350m)으로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아무리 MTB를 해보고 싶었다지만 처음부터 해발 600m라니 사람 잡을 일 있나.
강촌역에서 마을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온 힘을 짜내야 하는 가파른 경사가 아니라 계속 적당한 세기로 페달을 밟아야 하는 기분 나쁜 오르막길이었다.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뚝배기에 몸을 담근 개구리의 기분이랄까. 춘천예현병원 옆에서 임도가 시작했다. ‘임시 도로’가 아니라 산림 자원 관리를 위해 만든 길이다. 자동차가 오가는 길이니 터무니없이 경사가 크지 않다는 뜻이다.
본격적인 산길은 경사도 경사지만 흙과 돌, 나뭇가지와 풀이 뒤덮은 오프로드여서 더 긴장됐다. 이준휘 작가는 “쫄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웬만한 크기의 돌은 핸들을 꾹 누르며 힘으로 돌파하라”고 강조했다. 그래, 여기는 석파령이니까. 배운 대로 기어를 낮추고, 핸들을 꼭 붙들고 페달을 힘껏 밟았다. 지그재그 오르막길이 한없이 이어졌다. 심박수가 높아지고 허벅지가 저려왔지만 죽을 만큼 힘들진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올여름부터 일주일에 세번 꾸준히 달린 덕에 체력이 꽤 늘어 있었다. 한없이 오르막길이 이어졌지만 “못해먹겠다”보다 “해볼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 달리기가 이렇게 좋은 거구나. 늘 비슷한 거리를 가볍게 달린 게 아니라 계속 거리를 늘렸고 남산의 오르막길을 달리며 트레일러닝도 했던 효과가 톡톡했다.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된 듯 뿌듯함이 차올랐다.
몇 차례 쉬긴 했지만 자전거에서 내리진 않았다. ‘끌바(자전거 끌고 가기)'를 하지 않고 정상에 당도했다. 이준휘 작가는 “이 정도면 남산도 충분하겠는데요?”라고 말했다. “수영도 할 줄 알면, 철인삼종도 하면 되겠네!” 그러고 보니 석파령이 남산보다 100m는 높았다. 그래. 굳이 자전거를 안 사도 되겠구나. 이 정도 체력만 유지하면 자전거 빌려서라도 남산을 오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새 나라 새 일꾼의 어깨가 너무 솟아올라 귀에 닿을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은 스릴이 넘쳤다. 나무 틈새로 비치는 햇볕 조각이 예뻤고 얼굴에 부딪는 바람은 시원했다. 콧노래 부르며 덕두원마을로 내려와서 이온음료를 사 마셨다. 활주로 같은 호숫길을 질주한 뒤 춘천역에서 닭갈비 사 먹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일상 복귀 후 2~3일 안장통과 경미한 근육통이 있었지만 금세 회복했다. 역시 아내 말 듣길 잘했다. 자전거를 안 사고도 언제든 MTB 코스를 소화할 수 있었던 건 아내가 ‘취미 가지치기'를 해준 덕이었다. 자전거를 샀다면 달리기 횟수가 줄었을 테고, 이것저것 벌려놓은 취미 때문에 집중력만 떨어졌을 테다. 언젠가 때가 오겠지. 자전거도 사고, 자전거로 꿀벅지를 단련할 때가. 그때까지 열심히 달려보기로 한다. 결론이 또 이상하다. 결국엔 러닝 예찬으로 끝나버리다니. 그러니까 자전거 살 형편이 안 되거나 다른 취미가 너무 많은 분들, 열심히 달리기를 합시다. 그리고 자전거는 필요할 때만 빌려 타도 괜찮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