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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맘 Jan 18. 2024

11 남편과 아이 말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무조림


남편과 아이가 시댁 식구들과 함께 제주도로 3박4일 여행을 떠났다.  4일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 나 혼자 집에서 지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남편과 아이가 떠난 첫 날 밤은 치맥이 국룰. 자담 치킨의 맵슐랭 & 후라이드 반반에 양념치킨 소스까지 주문, 칭따오 캔맥주 500ml를 곁들여 혼자 치맥을 야무지게 즐겼다.  


치킨이 너무 맛있어서 평소보다 과식을 해버린 바람에 다음 날에는 무언가 과하지 않은 것을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유튜브에서 마카롱 여사의 무 조림 레시피를 보고 강렬한 끌림을 느꼈지만, 나 혼자만을 위해서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요리를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귀찮음이 몰려왔지만, 남편과 아이가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 잘 하지 않았던 무조림은 나 혼자 있을 때 해먹으면 딱 좋을 요리였다. 나는 결국 무조림을 향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아파트 상가 야채 가게에 가서 3000원짜리 무 한 개를 사왔다.


마카롱 여사의 무조림은 무 한 개를 통째로 사용한 레시피였는데 이걸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먹고 다 남겨 버리면 어쩌지…’ 하지만 무 분량을 줄여 양념장 비율을 조절할 자신이 없었기에 일단 무 한 개를 숭덩숭덩 썰어 얕은 냄비에 켜켜이 쌓아 올렸다. 물 1리터와 국민육수 한 팩(미쉐린 레스토랑 밍글스에 갔을 때 답례품으로 받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거 심하게 맛있다), 소금을 약간 넣고 15분을 끓인 후 불을 끄고 1시간 뜸을 들인다. 분량의 양념장과 양파, 대파를 넣고 다시 30분을 끓이면 무조림 완성.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 걸리는 터라 그 사이 시금치 된장국까지 만들었다. 국민육수 국물에 된장과 다진 마늘, 국간장, 보리새우를 넣고 냉장고에서 운명할 뻔한 시금치 반 단까지 넣어 한소끔 끓이면 시금치 된장국 완성.


무조림 5~6개와 국물을 자박하게 접시에 담고, 시금치 된장국과 엄마표 총각김치를 곁들였다. 무조림을 한입 떠 먹었는데… OMG! 이 세상 맛이 아니었다. 달큰한 겨울 무가 입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국물은 또 어떻고! 처음에 국물을 너무 많이 뜬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웬걸, 국물만 떠먹어도 밥 한 공기 뚝딱할 수 있을 만한 천상의 맛이었다. 남편과 아이는 거의 다 남겼을 만한 메뉴인 시금치 된장국도 구수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두 꼬집 넣었던 보리새우가 킥이었다. 꽤 많은 양의 무조림은 모두 다 내 입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차려 놓은 모든 음식을 순삭해버리고 말았다.


‘아, 정말 무언가를 이렇게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었을까’ 생각이 들면서 문득 마음 깊은 곳이 뭉클해졌다. 아이와 남편을 취향을 우선 고려해 의무적으로 만드는 요리가 아니라, 내가 정말 먹고 싶은 음식을 나 혼자만을 위해 정성스럽게 요리한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 내가 나를 온 마음을 다해 돌보았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3000원짜리 무와 냉장고에서 돌아다니던 시금치로 끓인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한 끼였다.

P.S. 디저트는 전날 마켓컬리에서 주문해두었던 하겐다즈 미니 바 바닐라 카라멜 아몬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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