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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코 Mar 20. 2023

나의 뮤즈, 미국 아저씨들

언제부턴가 나의 드로잉 노트는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앞에 보이는 쉬운 사물 위주로 그렸는데, 그림을 그릴수록 사람이 한 명, 두 명 늘어나더니 노트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렸을 때도 나의 빈 연습장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커서도 그 취향은 변함이 없다. 그때는 만화 주인공들을 그렸다면, 지금은 일상에서 스쳐 지나간 실존의 인물이라는 차이 정도. 


사람을 그리는 건 어렵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재밌다. 사람마다 체형도, 움직임도, 스타일도 모두 달라서 그릴 때마다 어려움을 느끼지만,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같아서 확실히 재미가 있다. 특히 미국 사람들을 그리는 게 굉장히 흥미롭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섞여있는 나라에선 도서관 의자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생김새, 피부, 스타일이 모두 다른 사람들을 잔뜩 목격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들을 마구 노트에 채워 넣다 보면 공통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내가 더 좋아하는 부분을 골라서 그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별된 취향이 드러나는 것이다. 내 취향은 아저씨들이었다. 아, 이상형이 아니라 나의 드로잉 취향이 그렇다는 것이니 오해는 마시라. (나의 이상형은 이도현과 박보검이다.)


여성을 그릴 때는 머리스타일, 패션 등 그림에 디테일이 많이 필요하고, 어린아이는 작게 그려야 하니 비율을 맞추는 게 어렵다. 반면에 미국 아저씨들은 아주 심플하다! 대체로 큰 풍채를 자랑하는 미국 아저씨들은 옷차림은 셔츠에 청바지로 아주 심플하지만 거기에 각자만의 개성이 반드시 하나씩은 탑재하고 있다. 가령 어떤 아저씨는 배가 불룩 나왔고, 어떤 아저씨는 턱수염이 북실북실하다. 긴 머리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아저씨도 있고, 빵모자를 쓴 아저씨도 있다. 심플한 형태에 각자만의 개성이 담겨 있으니 초보 그림쟁이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뮤즈가 있을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미국 아저씨들 그림만 모아서 ‘미국 아저씨들'이라는 제목의 드로잉 북을 만들어 보는 것. 웃긴 건 이 목표가 생긴 뒤로 내 눈에 아저씨 레이더가 장착돼 버렸다는 점이다. 아저씨가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거나, 엄청난 사이즈의 체크 셔츠를 입고 있다거나, 굉장히 세모난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면 ‘아..! 그리고 싶다!’라는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대놓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스쳐 지나가는 나의 뮤즈를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니. 언제든 기억 속에서 꺼내 그릴 수 있도록 빠르게 포착하고, 빠르게 저장하는 능력이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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