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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코 Mar 31. 2023

종이를 구하러 어디로 갈까요?

미국에서 종이를 구해본 적이 없어서요.

처음이라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책을 만들고 싶은데, 미국에선 어디서, 어떤 종이를 구할 수 있는지 전혀 정보가 없는 이런 상황이 그렇다. 복사용지야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더 두껍고, 조금 더 선명한데, 너무 새하얀 색은 아닌 그런 종이다 보니 난항에 부딪혔다. 한국에서 자주 사용하던 미색 모조지 100g 정도면 딱 좋을텐데, 영어로 미색은 뭐고, 모조지는 어떻게 검색해야 하는건지. 게다가 여기는 g(그램)이 아니라 lb(파운드)를 쓰니 파운드를 그램으로 바꿔서 계산하는 것만 해도 아주 머리가 지끈거린다. 


미국인 친구나 미국에서 꽤 오래 산 친구들에게 물어봤지만 뾰족한 답을 얻진 못했다. 사실 책을 만들어 본 적이 없으면 종이 종류나 평량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다. 한국에서 나도 처음 책을 만들때 수많은 종이 종류를 마주하고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었으니 그들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오프라인에서 paper를 취급하는 가게들을 죄다 둘러보고, 마땅한 종이가 없어서 가게의 점원한테 물어보고, 독립출판을 입고 받는 아트센터에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아. 종이 구하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던가. 지난 일주일 내내 종이, 종이, 종이, 온통 종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은 아마존에서 종이를 주문했다. 아마존은 정말 정말 정말 최후의 보루였다. 500장을 기본으로 파는데, 문제는 정확히 어떤 색의, 어떤 재질의 종이인지도 모르고 무게만 보고 500장을 시켜야 하니 선뜻 주문 버튼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여기저기 찾아도 마땅한 걸 찾지 못해서, 결국 시키긴 했지만 '1장 써봤는데 별로면 어쩌지….' 하면서 배송 받은 패키지를 뜯을까 말까 한나절이나 고민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500장짜리 종이 패키지를 뜯어 보기로 결심했다. 써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 사실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이미 오전에 들른 가게에서 너무 두꺼운 종이를 사는 바람에 2만원을 날린 상태에서, 또 망하면 또 2만원을 날리게 되는 셈이었지만 안 써보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며 결국 포장을 뜯었다. '써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음에 어떻게든 쓰겠ㅈ....오?'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패키지를 뜯고 종이를 만지는 순간 느꼈다. 이번에는 2만원을 날리지 않아도 되겠다는 걸!


주문한 종이는 책의 내지로 쓸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두껍고 퀄리티가 좋아서 표지로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표지로 쓸 종이가 생겼으니, 내지로 쓸 종이는 이거보다 조금 더 얇은 걸 주문해도 되겠다며 곧바로 조금 더 얇은 종이를 아마존에서 또 주문했다. 전보다 주문 버튼을 누르는데 거침이 없어졌다. 패키지를 뜯지 않았다면 또 한없이 망설이는 시간을 가졌을 게 분명하다. 어째저째 주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또 패키지를 뜯을까 말까 한나절 고민했을 지도 모른다. 처음은 그렇다. 어쩔 수 없이 망쳐도 보고,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당해봐야 한다. 그래야 뭘 알게 된다. 패키지를 뜯은 덕에,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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