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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쌤 Jun 06. 2020

23) 드디어 영주권 받다

Skilled worker(경험이민)의 경우 

준비 서류가 많고, 나의 고용주가 외국인 직원의 이민을 위해 서류 지원하는 것이 처음이라 나도 고용주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럴 경우 변호사나 이민 컨설팅 회사의 도움으로 진행하는데, 당시 변호사는 이민 컨설턴트보다 2천 불이다 더 비쌌다.

캐나다 이민 컨설턴트를 만났는데, 주로 이메일로 연락을 주었고, 본인의 사정에 따라서 연락이 바로바로 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다른 주에서 일하시던 한국인 이민 컨설턴트를 소개받았는데, 이메일과 전화, 카톡으로  빠른 답변을 주었고 나의 절박한 상황도 이해해 주어서 좋았다. 


서류 중에 고용주가 나에게 경제적인 부분을 지원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no라고 체크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나의 영어시험비를 지원하다거나, 남편의 캐나다행 티켓값을 지원하다든지 하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의사가 있는지 묻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yes라고 체크하면 실제로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원장님은 no에 체크했다. 


이걸로 이민과정 전체가 물거품이 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데, 이민 컨설턴트가 핼리팩스에 들린 김에 우리 원에 들러서 원장님을 설득해 주었다. 

“Sue, 네가 아끼는 좋은 직원 맞지? 이미 남편도 와있고, 영어시험도 봤고, yes라고 체크한다고 너의 돈이 들어갈 일은 없어.

그러니 형식적으로만 yes라고 체크해서 Sue의 이민이 잘 끝나게 도와줘!“


여기까진 원장님이 계속 no를 고집할 자세였는데, 똑똑한 이민 컨설턴트가 세금 환급에 활용할 수 있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 조언 덕분에  yes라고 체크해 주었고 모든 서류는 다 준비되었다. 

그래서 내가 준비하는 것보다야 비용은 들었지만, 이 분을 고용한 게 잘 한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 정부 이민은 주로 몇 달 안에 끝나고, 연방정부 이민은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되는데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건강검진을 하게 된다. 

핼리팩스에 이민 신청자들의 건강검진을 해 줄 수 있는 의사가 한 명인데, 이 사람에게 문진과 기본 검사를 하고 엑스레이와 혈액검사는 다른 곳에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캐나다는 무상의료를 제공하는 관계로 이민 신청자가 치료비가 많이 드는 지병이 있다고 판단되면 이민 신청이 거절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담당 의사가 추가 혈액검사를 요구해서 혹시라도 거절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네 명 다 무사히 통과되었다.

모든 게 다 끝난 것을 통보받은 이후로, 이민 컨설턴트와 며칠 연락이 안 되어 물어보지 못하고, 우리의 판단으로 국경에 가서 영주권자 확인증(confirmation of permanant residence)을 받았다. 

육로로 갈 수 있는 제일 가까운 국경이 왕복 10시간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남편과 교대로 운전해서 도착한 후, 미국 쪽 사무소에 들어가서 바로 차를 돌려 캐나다 사무소로 갈 거라고 말한 후 20여 분 기다렸는데,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 

바로 돌아가는 데도 우리 여권으로 한참 조회하고 차 안을 조사한 후 돌아가게 해주었다.

캐나다 사무소로 들어가 한 명씩 이런저런 사항에 대답을 하고 영주권자 확인증을 받았다. 

이 확인증만 있으면 바로 한국에 가도 되는 줄 알고 한국행 티켓도 사놓고 일부러 국경까지 갔는데,  서류를 받고 한 달쯤 후에 나오는 영주권 카드를 받아야만 해외여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 출처 : 구글 이미지


영주권자들은 해외로 나갔다가 들어올 때 이 영주권 카드가 있어야 하는 것을 몰랐다. 


이 부분을 알았더라면, 국경에 가지 말고 그냥 기다리다 우편으로 영주권 카드를 받았을걸, 항공권을 여름으로 다시 바꿔야 했다. 


이 영주권자라는 신분으로

5년 동안은 캐나다에서 살 수 있고, 고등학교까지의 자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혜택, 늙으면 각종 연금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다. 


몇 년간 못 간 한국에 갈 수 있고, 융자를 받아서 집을 살 수도 있고, 힘든 고용주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과감히 사표를 쓰고 직장을 옮기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은  다른 주로 떠나기도 하고, 캐나다인들과 동일한 적은 학비로 대학 공부를 할 수도 있다.


나의 경우 공립학교에서 일하는 pre-primary 선생님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남편은 국립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이 영주권 카드를 받고 나면 

많이 허무해 하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한다. 


'이걸 얻으려고 그동안 그렇게 고생했나?' 하는 사람들도 있고, 투잡을 뛰거나 힘든 근무환경에서 '한국에서 내가 이렇게 일했으면 벌써 성공했지!'라는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경우 3년의 시간 동안 내 주제 파악이 더 되었다.


영어 좀 하고 운이 억세게 많아 만사형통할 것 같았는데, 영어도 부족했고, 매일매일이 도전이었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 앞에 선 딸 앞에서 울기도 했다. 


의식주 하나하나 내가 직접 해결해 나가며, 멀리서 지원해 준 남편과 절망하는 엄마 옆에서 위로해 준 딸들의 소중함, 지금 생각해보면 그동안 크게 아프지 않았던 내 건강도 큰 재산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더 겸손해진 것 같다. 


내게 저절로 얻어진 것에 대한 감사, 힘들게라도 얻은 것에 대한 감사.


내가 수속을 밟고 있던 중에 외국인 고용기준이 까다롭게 바뀌면서 한국에 돌아가야 할 뻔한 시점에서 편입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왜 일이 이렇게 힘들어지나 했는데, 다 끝내놓고 보니, 이게 캐나다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즉, 학생이 되어 공부하면서 학비에 렌트비, 생활비를 쓰며 캐나다 경제에 보탬이 된 후, 취업과 영주권자로서의 혜택을 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교를 다니며 이 사회에 대한 이해나 적응이 빨라진 것도 큰 소득이었다. 


주변에 보면 나보다 더 공부 많이 하고,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도 안 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1년 공부 후 정말 운 좋게 3년짜리 취업비자를 받았는데, 내가 졸업하고 2년쯤 후에 이민국에서 이 학교는 졸업생들에게 졸업 후 취업비자( Post Graduate Work Permit)를 줄 수 없는 학교였다면서 그 해엔 졸업생의 반절에게만 비자를 주고, 다음 해부터 완전히 중단되어서 큰 이슈가 되었다. 


이렇게 이민에는 운과 타이밍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방인이 되어보고 나서야 우리나라에 있는 이방인들이 다시 보였다. 


새터민, 조선족,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외국 노동자들, 난민들.


내가 한국 시민권자로서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간절하고, 아주 많이 노력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난 한국 시민권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냥 우연히 태어난 곳이 대한민국이었을 뿐.


그렇게 그냥 우연히 태어난 곳으로 언젠간 돌아갈 것이다.


캐나다가 아무리 좋아도, 난 한국인 국적으로 살다 가고 싶다. 


돌아갈 내 나라가 요즘 너무나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그땐 다시 역이민의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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