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운전의 서러움
오늘 출근길에 벤츠를 박아 버렸다. 벤츠를 박으려고 박은 게 아니라, 박고 보니 벤츠였다. 그것도 S클래스. 운전한 지 2주밖에 안 된 내가 낸 첫 사고가 주차된 벤츠를 들이박는 거라니.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골목길에서 빠져 나오던 트럭을 옆으로 피하려다 불법주차된 벤츠를 뒤에서 박았다. 이럴 땐 트럭을 욕해야할지, 불법주차한 벤츠를 욕해야할지, 차를 기어코 끌고 나와 이런 사태를 만든 나를 욕해야 할지. 도저히 분간이 안 간다. 아니 왜 또 벤츠 차주는 연락처도 없는거야? 부랴부랴 포스트잇에 연락처를 남기고 출근한다.
출근하고 나서도 사고 생각. 연락처 남긴 포스트잇이 바람에 날라가서 내가 뺑소니로 몰리면 어쩌지? 차주 분이 불같이 화내시면 나는 어떻게 사과드려야 할까? 경찰에 신고하고 휴대폰 번호라도 조회해서 먼저 연락해야 하나? 보통 수리비가 적게 나오면 보험처리 안 하고 현금지급으로 끝낸다던데... 아냐 벤츠는 조금만 까져도 몇 백이라는데... 보험 대물한도가 얼마지? 200? 나 첫 보험이라 210만원이나 냈는데 여기서 할인도 안 되고, 오히려 할증이 더 붙는다고? 오 마이 갓.
그렇게 마음 졸이기를 3시간. 드디어 차주 분에게 연락이 왔다. 목소리부터 젠틀하시고 차분하신 중년의 남성 분.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로 시작하여 구구절절 사고 낸 경위를 말씀드리자, 그랬냐며 오히려 “어떻게 처리할까요?”라고 물어봐주시던. 일단 보험접수는 해놨다고 말씀드리자, 그럼 일단 센터에 가봐서 수리비가 적게 나오면 접수를 취소하고, 많이 나오면 보험처리하자고 해결책을 제시해주셨다. 천산가?
아! 벤츠를 끌면 마음씨도 벤츠가 되는건가? 놀랐던 마음이 사르르 가라앉는다. 물론 수리비가 너무 높아 보험처리를 하긴 했지만. (눈물) 앞으로 3년 간 할증 붙은 보험료를 내겠지만. 비록 나의 차는 번호판이 찌그러지고 범퍼모양이 조금 이상해졌어도 자기부담금이 아까워 자차처리를 안했지만. 나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차는 고치면 된다며 오히려 안심시켜주시던 그 아량이 고마웠다.
하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하루에도 내 마음은 수십 번씩 변했다. 사고를 낸 후 내 의식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아, 인생 망했다. - 아니야, 인생 경험 한 거지. - 형이랑 엄마한테 사실대로 말할까? - 아니야. 나 때문에 모두 기분 안 좋아지고, 걱정할거야. - 우울해. 죽고싶다. - 차주 분이 그래도 좋으셔서 다행이다. - 보험료 얼마나 오를까? 나 돈도 없는데. 할부로 낸다고 해도 달마다 30씩은 내겠네. - 짜증나. 왜 하필 거기에서 트럭이 나와? - 아, 내가 먼저 피하지 말고 그냥 스쳐 지나갈 걸. - 오늘 아침에 불길하더니만... 역시 차를 끌고 나오면 안 됐어. - 넌 진짜 왜 그러고 사냐? - 차를 왜 박았지? - 아냐. 돈 내는 건 미래의 나니까 잊고 살자. - 그치만 자꾸 생각나. - 우울하고 불안해. - 언젠간 잊힐거야. 이것도 꽤 나쁘지 않은 경험이지 않을까? - 중고차 값을 안 냈으니까 대신 보험료로 3년 간 할부 낸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뀐다. 절망적이었다가 희망적이었다가. 잊고 살고 싶은데 잊혀지지가 않는다. 글을 쓰고 나니 속 시원했다가 친구들과 다시 그 얘기를 하다보니 우울해지고, 운동을 갔다 집중이 안 돼 다시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니 속 시원해지기도 한다.
친구들과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2020년 1월 로또 1등 배출 복권방이 눈에 띈다. 희망을 품고 5,000원 어치의 로또를 산다. 이 로또가 300만원이라도 당첨이 된다면 그 땐 웃으면서 가족들에게 사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으리라.
“나 사실 고백할 거 있는데, 결말은 좋으니까 화내지 말고 들어봐! 내가 출근길에 맞은 편 트럭을 피하려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