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어떻게 써야 한다는 식의 말들과 책이 자주 눈에 띈다. 한편으로 좋은 충고이고 조언이겠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별로 생산적이지 않은 공허한 간섭이다. 좋은 글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하는 식의 거창한 제목 아래를 살펴보면 그저 기본적인 글쓰기의 태도 방식에 대한 큰 주제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내용들이다. 의무교육을 마치고 어느정도 자신의 표현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이미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야기 한다. 내 생각으로 그건 몰라서 못하는게 아니라, 알고도 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성경을 읽는다고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는건 아니고,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백번 읽는다고 해서 무서록 같은 글이 쉽게 쓰여지는 것도 아니다. 좋은 문장, 좋은 글은 어떻게 써야 한다고, 이렇게 쓰면 안된다고 마치 훈계하는것처럼 조언하는 것은 좀 주제넘어 보인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식이 있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글을 써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방식이 만약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좋은 글은 모두 획일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인데, 그럼, 그것이 정말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될까?
감동을 주는 좋은 글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 글이 어떤 정해진 방식이나 규칙을 지켰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크게는 글을 쓰는 사람의 뜻과 그 뜻을 풀어내는 글이 서로 잘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 공명의 울림이 읽는 사람과 조응할 때, 감동이 생기는 것이겠고, 조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독자의 비평은 가각한 것이 될 것이다. 공명이 생기는 것은 무수히 많은 다양한 이유와 작용의 신비스러운 이치가 있을 것이다. 그걸 객관적으로 풀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평이한 말로 설명해주려는 이들의 노력을 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얼만큼의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결국 좋은 글의 문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단 먼저 써야 하는 것이다. 좋은 글이 어떤지를 배우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좋은 글이 써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덜된 글이어도 일단 쓰기를 장려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겠다. 좋은 글을 강조하는 방식은 아직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늘 글쓰기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게 하는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덜 된 글이어도 쓰는게 안쓰는 것 보다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덜 된 글에서 때로 제대로 된 생각이 드러나기도 한다. 기교와 방식으로 익힌 글쓰기는 자칫 잘 된글이지만 생각이 없는 글로 이어질 가능성도 만들어 낸다. 이런 관점에서 과연 정말 덜 된 글은 무엇일까? 형식의 짜임은 없지만 생각이 있는 글과, 잘 짜여진 형식을 가졌지만 사상이 공허한 글 중에서.
먼 곳까지 달려야 할 때, 처음에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속도로 달리게 될 것이다. 마라톤이 시작되는 광경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달리는 속도는 저마다 제 각각이 된다. 끝까지 빠르게 뛰는 사람도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은 빠르게 달리다 느리게 달리다, 걷다가 다시 뛰다가를 반복하면서 중도에 멈추기도 하고 끝까지 가기도 한다. 글쓰기도 이와 같을 것이다. 어느 정도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 있지만 결국 사람들은 자신만의 속도와 스타일을 가지고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좋은 글을 쓰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일이다. 누군가가 지시하고 조언하고 비평한다고 해서 좋은 글이 금방 나오게 되지는 않는다. 못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못난 일은 좋은 글은 이렇게 써야한다고 말해주면 정말 좋은 글을 쓰게 될거라고 믿는 순진한 자만이다. 좋은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충고” 할게 아니라, 정말 좋은 글을 “쓰는”게 자신에게 더 당당한 일이 될 것이다.
글쓰기는 기교나 숙련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각의 문제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들 고등학교 국어시간부터 익히 들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점점 많이 생각한다는게 어려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강요되는 지식과 교양과 교육, 심지어 욕망과 충동까지도 비슷하게 이루어진다. 아파트라는 규격화된 공간에 몸을 숨기고 그 사물함 같은 콘크리트 큐브속에 영혼을 보관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생활은 생각이라는 것을 점점 사치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일부러 멀리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화젯거리와 뉴스를 함께 이야기 할 것이다. 결국 모두 동일한 소스를 통해서 얻게 된 정보들일텐데도 서로가 가진 정보를 재차 확인한다. 새로운 정보를 얻는 대화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널리 알려진 정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에 그치고 만다. 서로 다른 관점, 서로 다른 내용, 서로 다른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글쓰기는 중요하다. “좋은 글” 이라는 명분으로 획일적인 기준을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몇 년간 영어를 가르치면서 느꼈던 문제에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영어를 사용하도록 가르치는게 아니라, 영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서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중에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학생들의 수는 지극히 미미하다. 그럼에도 내가 가르치는 대부분 영어교과목의 내용에는 영어를 가르칠때나 필요할 만한 정보가 가득하다. 교육의 과잉이다. 특히, 영어의 경우는 그 인플레가 100년전부터 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윈도우를 열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를 사용할때마다, 그 소스코드를 고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워드를 사용하는 사람이 소스코드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이 쓸때마다 좋은 글이 어때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까? 그냥 쓰면 되는 것 아닐까? 좋은 글을 강요해서 사람들에게 글쓰기의 걱정과 두렴움을 주는 것은 정확한 영어를 강조해서 오히려 영어를 마음편하게 쓰지 못하게 하는 형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좋은 글”은 단지 효율적인 글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학문적인 글쓰기는 생활속의 글쓰기와 다르고 언론에서의 글쓰기는 블로그의 글쓰기와 다를수 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기본적인 전제로 한 많은 글쓰기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전의 반열에 오른 글들이 그렇듯이 그 경계는 글을 쓰면 쓸수록 점점 희미해 진다. 과학자의 글이라고 항상 객관적이고 논리적일 수 없고, 무당이 쓰는 글이라고 논리가 없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드의 글속엔 감동이 있고 세익스피어의 드라마에는 과학이 있다. 하이젠베르그의 글속엔 내밀한 고백이 있고, 루소의 사적인 고백속엔 계몽주의적인 인간관이 있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일기가 주는 감동은 그것이 “잘 씌여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