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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석문 May 07. 2020

영화 <1917>, 스펙터클의 역설

영화 <1917> 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하여

   ※<1917>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욕망에서 출발했고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 <열차의 도착>(1895) 당시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재현된 현실을 본다는 감각이 부족했기에 스크린을 통해 달려들어 오는 기차를 보며 크게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인간의 꿈과 상상을 표현했고 조르주 멜리어스의 작품 <달세계 여행>(1902)은 이것을 스크린에 담았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의 현실을 재현하거나 때론 뛰어넘어 꿈과 상상의 세계를 구현했다.


1. 왜 스펙터클 인가?


   조르주 멜리어스의 작품 <달세계 여행>이 사람들을 꿈과 환상의 영역으로 인도한 이래로 지금까지 영화는 꾸준히 상상과 욕망의 영역을 가능한 현실적으로 재현해내는 것에 몰두하였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들이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다. 블록버스터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관객이 몸소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스펙터클을 깊게 끌어들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흥행 영화들은 스펙터클을 극대화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대표적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들 수 있다. 이 프랜차이즈 영화들에 대한 전 세계적인 열광은 영화가 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목적만 가지고는 소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제 영화는 관객의 상상과 욕망을 현실로 만들고, 보는 것을 넘어 체험의 영역으로 인도해야만 광범위하게 소비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스펙터클'이다.



2. 원 컨티뉴어스 숏의 진정한 목적


   영화 <1917>이 공개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전쟁 영화에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ous Shot)'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ous Shot)' 기법은 장면을 나누어 찍고 이것들을 다시 이어 붙여 마치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게 만든다. 따라서 <1917>은 영화 전체가 단 한 번의 컷도 없는 마치 한 장면으로 이루진 것 같다. 이 기법을 영화 전체에 그것도 전쟁 영화에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샘 맨데스 감독과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의 야심 찬 기획으로 단정 짓기에는 다른 목적과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오마하 해변 전투 장면


   우선 우리가 보았던 과거의 다른 전쟁 영화들을 떠올려 보자.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적이고 현장감 넘치는 전장의 묘사로 모두를 감탄하게 했던 작품으로 잘 알려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카메라 즉, 관객의 눈이 되어주는 시선은 전장의 곳곳을 빠르게 누비며 활공한다. 이 시선은 병사들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움직임, 신체의 절단과 파괴, 그리고 훼손된 육체를 다양한 각도와 시점으로 응시한다. 떨어지는 포탄의 굉음과 귓가를 스치는 총탄의 육중한 마찰음, 병사들의 신체를 뚫고 지나가는 파열음, 쓰러져 죽어가는 병사들의 울부짖음과 절규 그리고 실제로 느낄 수 없지만 느껴지는 것 같은 매캐한 화약냄새를 끊임없이 제시한다. 모든 것을 다 들여다보며 관찰하는, 마치 전지전능한 신적인 시선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에 우리는 전장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전쟁 영화의 시선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전장이 주는 스펙터클을 몸 전체로 느끼게 된다.


   특히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두 동강 난 신체의 상반신을 다른 병사가 끌고 가는 장면은 폭력의 결과물을 마치 포르노그라피 적으로 전시한다. 타인의 개인적 고통을 눈요깃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마치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의 죽음과 고통을 눈앞에서 즐기듯이. 이와 같이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클로즈업하여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위협하고 관객에게 최고의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에 더욱더 몰입하게 한다. 더 나아가 관객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외적으로 금기시하지만, 내적으로 폭력에 대한 욕구를 은밀히 즐기도록 유도한다. 결국 관객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영화 속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체험하며 즐기는 위선적이며 기만적 행위에 동참한다.

   특히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카메라가 영화의 초반부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전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익스트림 롱 숏(Extreme Long Shot: 롱숏 보다 피사체를 더 멀리서 잡아 배경에 비해 인물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거리로 촬영하여 관객에게 장소와 시간에 대한 정보를 제공)으로 구현할 때 스펙터클은 극대화된다. 드넓은 전장 속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전시되는 고통은 집단적 죽음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명시된다. 다시 말해 수많은 죽음들 조차 스펙터클로 수렴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대형재난과 비극 속의 사상자를 특정한 숫자로 무심히 전달하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1917>,  참호를 통과하는 스코필드(앞) 와 블레이크(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염두에 두고 <1917>을 생각해 보자. 거대한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전장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1917>의 카메라는 실제 인간의 눈을 닮았다. 인간의 시선과 시야는 매우 한정적인 것처럼 <1917>의 카메라는 실제 인간의 시선과 높이를 가능한 유지 하며 영화 속 인물들을 쫓는다. 때때로 정면이나 측면을 응시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인물들을 뒤따르고 그 주위를 맴도는 것에 만족한다. 인간의 눈을 닮은 카메라의 시선은 실제 우리가 보는 것처럼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카메라처럼 전장을 유유히 누빌 수 없기에 관객은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볼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한정적인 전장의 체험으로 인해 관객은 기대했던 스펙터클한 전장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이 효과로 인해 <1917>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느꼈던 강렬한 스펙터클이 사라진다. 스펙터클이 소거되고 좁은 시야로 보이는 것 만이 전부인 세계. 그것이 바로 <1917>이 표현하고자 하는 전장의 모습이다.


   카메라는 영화의 눈이다. 영화의 시선과 시점은 결국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의 문제로 직결된다. <1917>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공통적으로 전장을 체험시킨다.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전장 속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스펙터클로써 전시하는 것과 다르게 <1917>은 전장을 개인적이며 한정된 체험의 공간으로 축소하여 표현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명시하여 스펙터클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오히려 밀어낸다. 이로써 관객은 온전히 영화를 통하여 전쟁과 폭력, 죽음,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본질과 그가 처한 세계를 목격하게 된다.

결국 <1917>은 기존의 전쟁 영화와는 전혀 다른 상반된 관점과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 원 컨티뉴어스 숏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펙터클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3. <1917>에서 스펙터클을 소거하고 남는 것


   관객이 안락한 곳에서 영화를 통해 재현된 리얼리티를 목격하는 것이 반복되고 무분별한 스펙터클에 노출될수록 스펙터클에 대한 욕망의 역치는 상승한다. 결국 관객은 더 거대한 스케일과 사실적이며 강렬하게 세세한 폭력과 죽음, 고통을 원하게 된다. 이것이 미덕이 되는 영화의 세계 안에서 스펙터클은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무뎌지게 만든다.


<1917>, 독일군 조종사를 구해주려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집단적 고통과 죽음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여타 영화에 비교해 <1917>에는 오직 개인적 죽음만이 세 번 제시된다. <1917>에서는 개인적인 살인과 죽음 만이 존재하게 되는데, 마치 뜻하지 않은 사고와 같이 오인과 오해, 우연으로 점철된 비목적적이고 비의도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 분)의 죽음은 불길에 휩싸인 채 추락한 전투기에 갇힌 독일군 조종사를 선의로 도와주려다 오히려 서로 간의 오인과 오해, 소통의 부재로 인해 도와주려고 했던 자에게 오히려 살해당하는 당혹스러운 과정을 표현한다. 이것은 전쟁에서의 살인과 죽음은 목적이나 의도, 정당성을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사고이자 우연한 삶의 비극과 같이 슬프고 허망 것임을 드러낸다.


  또 다른 살인과 죽음은 스코필드(조지 매케이 분)가 독일군 주둔지를 통과하다 마주친 독일군 병사에게 그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하지만 오해와 불신으로 인해 둘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지며 발생한다. 이때 스코필드는 물리적인 힘으로 독일군 병사를 제압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여타 전쟁 영화의 액션신과는 다르게 카메라는 크게 미동하지 않고 그저 측면에서 응시하기만 한다. 이 순간 처절하면서도 동시에 서글픈 정서를 내뿜는다. 스코필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생을 선택하지만 여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살아남았다는 안도나 적을 제압했다는 승리의 쾌감이 아니라, 원치 않은 살인을 한 것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책감과 무력감, 절망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1917>에서 인물들 간의 폭력과 액션의 결과로 발생하는 살인의 순간과 결과물로써의 사체들은 자세히 묘사되지도 그렇다고 전시되지도 않는다. 이로써 관객은 그들 사이에 벌어진 액션신을 마음 놓고 즐길 수 없게 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저격 대결 시퀀스의 한 장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액션신은 서스펜스와 스릴, 쾌감으로 얼룩진다. 특히 영화 중반부에 미군과 독일군 양국의 저격병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대일 저격 대결 시퀀스는 긴박하게 교차하는 숏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 두 저격병의 스코프가 일치하는 순간 굉음과 함께 미군 저격수에게서 발사된 총탄은 독일군 저격수의 눈을 관통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이 순간을 클로즈업을 통해 자세히 묘사하여 죽음의 순간을 전시한다. 이를 통해 개인적인 죽음들조차 스펙터클로 수렴시키고 관객은 자연스럽게 영화에 깊이 이입하며 강렬한 영화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4. <1917>의 미장센과 서사가 강화하는 주제의식

   

   <1917>은 전장을 묘사하면서 인간이나 동물의 사체를 전장에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조금 전에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보이는 전장의 대지 위에는 여타 영화에서 흔히 제시하는 죽음의 흔적들이 비현실적일 만큼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여기서 내밀히 기대했던 폭력의 풍경 즉, 스펙터클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917>의 서사는 매우 단순화되어 있다. 1차 세계 대전의 어느 한 전장으로 보이는 참호에서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다른 지역의 참호에 있는 매켄지 대령(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에게 예정된 공격을 중지하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A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는 이 단순한 서사에서 주목해 볼 것은 A 지점과 B 지점 즉, 시작지의 참호와 종착지의 참호 사이의 미장센의 차이다.


<1917>, 시작지의 참호를 빠져나가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시작지의 참호는 어두운 계열의 갈색, 회색의 흙 빛깔로 그 폭이 매우 좁고 가파르다. 우리에게 익숙한 참호의 모습으로 사실적이며 현실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참호 사이를 빠져나가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를 쫓다 보면 끝없이 이어진 좁은 공간 속에서 자연스레 폐소 공포증을 느낄 것만 같다. 이곳에 주둔한 병사들의 모습은 반복된 전투와 일상화된 죽음으로 지쳐 있어 마치 유령과도 같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현실을 벗어나지 않은 죽음이 유예된 공간이다.


<1917>, 곧 전투가 시작될 종착지 참호의 입구에 도착한 스코필드


   시작지의 참호와는 달리 매켄지 대령이 있는 종착지의 참호는 전혀 다른 미장센으로 구축되어 있다. 이곳은 마치 바닷가의 백사장을 연상시키는 하얀 흙빛과 그 뒤로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어 이곳이 전장이라기보다는 마치 파라다이스의 어딘가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곧 벌어질 전투를 위해 참호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 앞에서 길게 늘어진 병사들의 행렬은 흡사 천국의 문에 들어가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이는 몹시 먹먹하고 동시에 비극적인 정서를 환기한다. 이곳은 죽음이 눈앞에 예정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작지의 참호에서 종착지의 참호로 이동하는 <1917>의 서사는 죽음이 잠시 유예된 공간에서 곧 죽음이 예정된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죽음을 막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음이 눈앞으로 예정된 공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전쟁의 비극과 고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전쟁 속에서 인간은 죽음과 고통을 피해 발버둥 치지만 죽음이 잠시나마 유예된 공간에서 오히려 더 죽음에 가깝게 다가가는 당혹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는 역설을 <1917>은 미장센과 서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1917>, 전투 중지 명령서를 읽은 매켄지 대령


   블레이크가 여정 중에 사망하고 스코필드는 홀로 우여곡절 끝에 매켄지 대령이 있는 참호에 도착한다. 그리고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공격 중지 명령을 매켄지 대령에게 전달한다. 명령서를 읽은 매켄지대령은 공격을 중지시키고 조소하듯 말한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 줄 알았건만. 역시 희망은 헛된 것이로군. 사령부는 또 명령을 내리겠지. 똑같이 새벽에 공격하라고. 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끝까지 가는 거지.

   매켄지 대령의 말은 <1917>의 주제 의식을 핵심적으로 관통한다. 전쟁 안에서 죽음과 고통은 잠시 유예될 뿐 곧 예정된 대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생존과 삶에 대한 희망은 어리석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죽음은 사령부의 명령으로 다시 집행될 것이고 전장에 밀어 넣어지는 수많은 병사들은 곧 그 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전쟁은 영웅이나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을 탄생시키지 않는다. 정당함과 명분으로 포장된 이데올로기나 순진한 휴머니즘 따위는 감히 들어설 수 없는 오직 죽음만이 시작이자 끝인 공간이다. 모든 것을 다 소멸시킬 때까지 파괴하고 죽음으로 밀어 넣는 인간의 어리석으며 악한 본성은 비단 어제와 오늘날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5. <1917>을 마무리하며


<1917>, 영화의 시작에서 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스코필드(우)와 블레이크(좌)


   우리는 오늘날 듣고 목격하 비극과 재난들 속에서 집단적인 죽음을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것으로써 애도해야 한다. 스코필드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여정은 영화 시작 지점과 마찬가지로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시 죽음이 유예된 공간인 전장의 참호 속으로 밀어 넣어질 것임을 예감한다. 그것이 바로 전쟁과 폭력의 본질이기에.


   종종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마땅히 옳은 것으로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때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믿어 온 것들을 거리를 두고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볼 수 없거나 고려하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나 가치,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을 발견하고 깨달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1917>은 훌륭한 영화적 체험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익숙한 것들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소중한 체험적 기회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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