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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석문 May 28. 2020

그래서 때때로 나도 올려다보기로 했다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했다. 분명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책장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지난날의 일기, 편지, 두서없는 글들, 사진들까지도 한데 묶어 치웠다. 그런데 지금 그것들을 마주하고 있다. 한 동안 노려보며 고민해 본다. 그래 왔던 대로 집어버리면 될 일데, 꽤 쉬웠던 일이 오늘은 어렵다.


   버리는 것이 아쉬웠던 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남아있을 리 없는 물건들이었으니까. 짙은 녹색의 일기장에는 그저 그런 하루의 일과가 담겨있었다. 일상으로 가득 찬 면 위에 예쁜 글씨로 선생님의 코멘트가 쓰여있다. 별 것도 아닌데 정성스럽게 적어 주신걸 보니 괜히 민망해진다. 편지들을 둘러보 더 민망해진다. 목적을 잃어버린 알 수 없는 글들은 못 본 체한다. 역시 버렸어야 했다.


   언제부턴가 덜어내는 일에 집착했다. 지나간 것에 가혹했다. 매정하게 대하면 그것들이 내게서 지워져 갈 줄 알았다. 특히 사진에게는 더 혹독하게 굴었다. 눈 앞에 펼쳐진 이미지는 나를 그 순간의 어느 지점으로 데려가곤 했다. 때때로 원치 않은 곳에 도착하면 그보다 곤란한 일은 없었다. 사진을 다시 보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 오래된 메일을 정리하다 첨부된 파일에 있는 사진을 무심코 눌러보았다. 마우스 커서가 삭제 버튼 위에서 깜박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딸깍' 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내리쳤다. 그리고 오랫동안 모니터를 응시했던 것 같다.


   책장 구석에 시선이 머무는 날이 있다. 가끔은 팔을 뻗어 닿아본다. 조금 머뭇거리다 이내 손길을 거둔다. 고개를 젓는다. 여전히 그것들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나도 올려다보기로 했다.



커버 이미지: 르네 마그리트, <The Listening Room>,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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