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명절 해방일기
나의 시아버님은 3남 1녀 중 차남이시다. 그래서 명절 차례와 시조부모님 기제사는 시백부님댁(큰댁)에서 지냈다. 결혼 후 맞은 첫 설 하루 전날 시부모님과 함께 큰댁으로 향했다. 나물, 탕국, 갈비찜, 산적, 생선구이, 삶은 닭 등 웬만한 요리는 시백모님, 시어머님, 시숙모님 세 분께서 주방에서 다 하셨고 큰댁 형님들(남편의 사촌누나들, 미혼과 돌싱), 형님 (남편의 누나), 작은댁의 도련님과 아가씨와 우리 부부가 거실에 모여 동그랑땡을 비롯한 각종 전 부치기를 담당했다. 작은댁 도련님은 차례 지내기 전과 후 집안 대청소를 도맡아 했고 주방에서 여자들을 몰아내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상남자였고, 남자어른들(큰 아버님, 아버님, 작은 아버님)도 명절 노동에 참여한다는 점이 신선했다. 복병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들 없는 큰댁에서 집안어른들 (특히, 큰어머님과 형님들)께 우쭈쭈 이쁨을 받는 귀남이 그 자체여서 결혼 전에도 명절에 일 안 하고 혼자 낮잠 자고 놀았다고 한다. 결혼하고 보니 내 남편은 귀한 시댁 장손이었던 것이다. 이거 사기결혼 아닌가? 생각해보니 큰댁에 누님들만 있다고 얘기를 했었는데 내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왜 그랬니? 나야! 지 발등 지가 찍은 여자가 바로 나야!)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빨간 다라이에 산처럼 쌓인 만두소였다. (빨간 다라이는 배추절일 때나 쓰는 거 아니냐고요! ㅎㅎㅎ) 설날이 되면 직접 만두소를 만들고 만두피까지 반죽해서 밀어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는데 거실바닥에 앉아 허리와 등이 아프도록 만두를 빚어도 만두소 산은 줄어들지 않았다. 남자 어른들도 명절노동에 동참하는 이유가 아마 이 만두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봤다. 결국 만두피 생산속도가 만두를 빚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집에 가서 해먹으라며 남은 만두소를 집집마다 싸주셨다. 다행히 우리 부부에게는 안 싸주셨지만 김치통에 담아간 만두소로 만두를 빚은 뒤 쪄서 얼리느라 어머님, 아버님은 명절이 끝난 후에도 쉬지 못하셨다. 그렇게 만드신 만두를 낼름 받아다 먹기만 하던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지만 당시 만두산에 놀란 나는 집에 오는 길에 남편에게 올드보이 찍는 줄 알았다며 올드보이에선 감금돼서 만두만 먹는데 나는 큰댁에 감금돼서 만두를 만들기만 하니 내가 더 힘든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곤 했다. 수제만두는 가끔 먹으면 별미이긴 하지만 문제는 만두가 투머치였다. 아무리 빚어도 줄지 않던 만두산은 아무리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냉동칸의 만년설이 되어 갔다.
사실 큰댁에서의 명절노동이 그렇게 힘든 건 아니었다. 나 혼자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일손이 많으니 온몸에 기름냄새가 나긴 해도 전 부치기도 두어 시간이면 끝나고 만두는 그냥 열심히 만드는 척만 했다. 그리고 다 같이 카페인 수혈을 하고 저녁 먹고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차례를 지냈다. 나는 차례상 음식 나르기, 차례 끝난 후 제기 닦기, 상에 수저 놓고 음식 나르기 정도 했었다. 평소에 시집살이의 ㅅ 자도 구경 안 시켜주신 시아버님, 시어머님은 아침을 다 먹기도 전에 차 막힌다고 기차 놓친다고 얼른 친정 가라고 등을 떠밀어주셨다. (눈치 없는 남의 편은 더 있다가도 된다고 뭉개다가 친정 가는 길에 나에게 참교육을 받았다. 하~ 남의 편!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먹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큰 댁에 가는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번째는 소외감이다. 남편과 사촌누나, 동생들이 옛날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지만 나는 그게 무슨 얘기인지 잘 몰랐고 남편이 중간중간 당시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줬지만 그닥 공감도 가지 않고 재미도 없었다. 나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만두나 빚을 뿐. 남편이 어렸을 때는 큰 댁, 작은댁, 우리 시댁 모두 한 동네에 모여 살았고 어른들이 일하는 동안 아이들은 이 집 저 집을 내 집처럼 오가며 한 가족처럼 자라왔다고 했다. 그래서 사촌 간 우애가 남달랐다. 결혼 전 명절 때 나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남편이 부모님은 차례 지내고 먼저 가시고 자기는 사촌동생, 사촌누나들이랑 떡볶이 해 먹고 이야기 좀 더 하다가 갈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은 친척들과 가까이 살지 않아서 가끔 명절이나 집안행사에나 만나서 인사하고 안부나 물을 뿐, 평소 때는 사촌들과 만날 일도 연락할 일도 없었던 나로서는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다. 어찌됐거나 명절 노동 중 담화는 그들만의 리그였고 나는 소외당하는 기분만 들었다.
그거야 1년에 두 번이니 그냥 넘길 수 있다 쳐도 결정적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 두번째 이유는 사촌형님들이었다. 남편에게 그녀들의 호칭은 사촌누나였지만 그녀들은 나의 시어머님과 비슷한 연배였다. 아버님과 큰아버님의 나이 차이가 20살 정도 나다보니 남편에게 큰어머니는 할머니뻘, 사촌누나들은 엄마뻘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남편 어릴 때 어머님이 일하시느라 바쁘면 사촌형님들이 남편 공부도 봐주고 병원도 데려가고 놀아주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촌형님들은 남편을 아들마냥 취급했고 집안의 귀남이를 데려간 나, 착한 작은 엄마(나의 시어머니) 덕에 시월드, 시집살이의 ㅅ도 모르는 나에게 사촌형님들은 시월드의 맛을 알려주려고 애쓰셨다. 나는 남편 항렬에서는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였고 그녀들은 나에게 응당 며느라기 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결혼식 후 처음 만나는 나를 그녀들은 당찬 며느리라고 불렀다. 내가 당찬 며느리인 이유는 결혼식 때 외국사람이 많이 왔고 내가 울지도 않고 신부입장 직전까지 하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웃으며 너무 반갑게 인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결혼식장이 자기 마음에 안들었다고 빈정댔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결혼식장이라 내 마음엔 쏙 들었고 양가 부모님들도 맘에 들어하셨고 친구들에게도 식장이 너무 예쁘다고 결혼식 후에도 칭찬을 받았던 곳이었는데 이미 결혼식도 다 끝난 마당에 저런 얘기는 왜 하는걸까? 결혼식장도 사촌시누 취향에 맞춰 골라야 하나? 이 말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거슨 바로 내가 시누이고 너는 며느리 나부랭이니 나는 너를 합법적으로 갈구겠다! 멕이겠다! 라는 선언이었다. 나에게 선전포고를 하시겠다! 싸움을 걸면 응해드리는게 인지상정! 쪽수가 밀리지만 어쩌겠는가? 쫄지 말자! 그래도 남편 입장을 생각해서 빙구같이 웃으며 착하게 대답했다. "형님~ 결혼식 때 제가 울면 귀남씨가 뭐가 되요? 제가 어디 팔려가는 것도 아닌데~호호호~ 그리고 식장 저는 엄청 맘에 들었는데 맘에 안드셨어요? 아우~ 어떡해요? 식을 다시 할 수도 없고~ 저희 나중에 리마인드웨딩 하게 되면 그때는 식장 골라주세요~ "
결혼 전 명절엔 낮잠자고 빈둥대며 주는 거 받아먹기만 하던 남편이 할 줄도 모르면서 전 부치는 내 옆에 앉아있는 걸 보며 피곤할텐데 들어가서 자라고 하고 혹시 영글이가 못자게 했냐고 농담처럼 뼈있는 말도 많이 했고 그 놈의 "친정갈거냐? 처가갈거냐?" 소리는 돌아가면서 녹음기마냥 계속 묻고 (당연히 가죠! 나도 엄마아빠가 있다고요!) "운전하려면 힘들겠다" 소리도 무한반복하셨다. 그래서 나도 녹음기처럼 대답했다. "기차타고 가는데요. 저희 집에서 여기까지 운전해서 오는 시간보다 기차타는 시간이 더 짧아요! " 그녀들은 내 기 죽이기에 실패했지만 시집살이의 ㅅ 자도 모르는 내게 기쎈 시어머니 4명이 생긴 기분이라 몹시 피곤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부터 명절노동에 단련된 전부치기와 만두빚기 에이스 시누이와 작은 댁 아가씨가 차례대로 시집을 가고 난 설, 큰어머님은 만두를 사오셨다. (와우!) 떡만둣국을 먹으며 모두들 사온 만두가 맛있다며 앞으로도 사와서 먹자고 대동단결해주셨다. 다들 만두 빚는게 힘드셨었나보다. 나는 속으로 앗싸!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2년이 흐른 후, 큰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큰댁에는 아들이 없으니 차남인 우리 아버님께서 차례와 제사를 가져오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어머님은 그렇게 되면 명절차례는 없애시겠다고 작은 어머님과 미리 합의하셨다고 선언하셨고 나는 겉으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속으로는 아싸! 가오리를 외쳤으나 큰어머님께서 이 제안을 거절하셨다. 나 죽을 때까지는 내 손으로 차례, 제사를 다 모시겠다며. 띠로리~~~
그렇게 시간이 흘러 또 다시 찾아온 설을 앞두고 난데없이 나라에 역병이 퍼졌다. 집합금지로 설에는 일단 모이지 않기로 했고 그후로 쭉 차례, 제사에도 모이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 규제가 완화되면서 다시 차례와 제사를 지내냐 마느냐 어른들은 논의를 시작하셨고 나는 안듣는 척 촉각을 곤두세웠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차례와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어쩌다보니 계속 차례와 제사를 건너뛰게 되었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는 명절 전날 시댁에 들러 점심만 먹고 친정에서 지내왔다. (시댁은 가까워서 자주 찾아뵙지만 친정은 멀어서 1년에 겨우 2~3번 밖에 못가서 그렇다.) 친정에서의 명절을 만끽하면서도 마음 한 켠엔 언제 명절 차례가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명절 차례를 없애기로 시어르신들께서 대승적으로 합의함으로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명절을 맞게 되었다. 만두산을 생각하면 혁명 그 자체였다. 이 집안 장손 귀남씨는 이 상황을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내적댄스를 췄다.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역설적이게도 시댁 명절 차례가 없어지니 명절에 더 명절기분이 난다. 시누이가 결혼하고 나서는 명절 때 만날 수 없었고, 나는 친정에 가도 오빠와 새언니를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명절 전날 시댁에 가면 시누이네 가족들을 만나 아버님이 해주시는 육전과 어머님이 해주시는 갈비 그리고 회, 치킨 등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저녁때 친정에 가면 오빠네 가족을 만날 수 있다. 새언니 서운할까봐 친정 먼저 가는 걸 제안했으나 딸들만 있는 집이라 다들 시댁 들렀다 오니 명절 당일날 가는게 좋다고 했다. 아이들도 사촌들과 만나서 신나게 논다. 양가 부모님들도 자식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 뿌듯해하신다. 누군가의 희생과 스트레스 없이 가족들이 다같이 반갑게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이게 진정한 명절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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