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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Aug 26. 2022

고집 센 싸움꾼


1.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망가뜨렸다. 친구를, 사랑을, 일상을,


그래서 영화가 아니라면 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아주아주 큰 그림을. 조금의 물도 섞이지 않은. 캔버스 위로 퍽퍽하게 얹은 색이 형형한. 마음 한 모퉁이에 여행가방처럼 처박힌 저것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탄생을 애원하는 그림. 부담스러 외면하는.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덮고 쌓는 일에 익숙하지만 애초부터 소거된 형태로 내놓는 걸 좋아한다. 교수님은 내게 말했가.


"음 이 부분은 고쳤음 해요. 일반적이진 않아요. 이런 화면은."


피드백은 잘 수용한다, 퍽이나. 건조하게 마른 물감 위에 내 맘대로. 채도가 낮거나 혹은 높거나. 음영이 낮거나 혹은 높거나 하는 색을 끼얹는다. 전구에 불이 들면. 나는 한 번의 획으로 붓터치를 끝내고 미완인 채로 내비둔다. 못생겼지만 정이 가는. 아쉬운 그림을 아낀다.


2.

2022년은 언제나 엘레베이터를 탔다. 우리 집은 3층이라 오십 개 남짓한 계단 위에 있다. 계단을 오를 수 있지만 나는 엘레베이터를 탔다. 무심코 자행한 습관적인 선택들이 모여 나를 이룬다.



잘하고 싶어 공부를 했고, 잘하는 걸로 돈을 벌고 싶어 공부를 했고, 잘하는 걸 잘 알려주고 싶어 공부를 한다.


백현진 배우의 글을 읽었다. 내게 글을 가르친 은유 작가가 인터뷰한 글이다. 두고 읽으려 필사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기 위해 백현진이 하지 않은 것들

1번.

작업의 규모를 키우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난 1인 사업자다. 혼자 그림 그리고, 흥얼거린 것으로 노래를 만든다. 작업을 계속하며 규모를 키운 사람을 많이 봤는데,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길 테니까.

2번.

가능한 한 전문가 집단과 어울리지 않았다. 휘둘리거나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계쏙하기 위해서. 예술가가 전문가 집단과 어울리려면 자신의 작업을 계속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갖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무언가를 그들의 시각에 계속 맞춰가고,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작업을 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3번.

변명거리를 찾지 않았다.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2004년, 먹고 살기 위해 소소하게 하던 일을 모두 정리했다. 작업을 할 수 없는 조건이나 환경에 대해 변명 거리를 스스로 갖지 못하게, 재료비나 작업실 없이도 작업 가능한 0.3mm 샤프를 선택해 <염기 섞인 붉은 책>이라는 드로잉 북을 만들었다. 그 책이 갤러리의 눈에 띄어 전속 작가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출처. 글 은유, 담당 정규영 기자, 인터뷰이 백현진. 디자인하우스(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3월호)



얼마 전 새벽. 장률 감독의 영화 <군산>의 연기가 인상깊어 유튜브에 있는 그의 모든 것를 훑은 기억이 있다. 그가 선행한 길이 내가 가고픈 곳에 가깝지 않을까. 하여 캄캄한 새벽이 느껴지는 작은 방에서. 유튜브로 그의 모든 것을 훑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지. 압도당한 나는 고장나 부사를 남발한다. 답은 엘레베이터가 아닌 계단에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3.

불면증 치료법 촬영으로 배운 것.


1_대사는 따발총을 쏘는 게 아닌 사이를 고려해 천천히 조준한다. 편집과 대사 전달을 위해.


2_웃고 귀엽고 멋진 씬을 찍을 때. 어색하다 생각들어도 늘상. 그렇게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마음이 문제다. 자신감을 갖고. 자신감으로 웃자.


3_어색한 장면들. 그것의 기원은 보통의 삶을 사는 여동윤에게 낯선 모든 것이다. 없다고 단언하는 나의 아집을 뚫고 연기할 수 있게 기회주는 사람들에 나는 더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4_얼굴을 핀다. 누군가 뒤에서 안면근육 끝을 잡아당기듯이. 입을 이완시킨다. 턱과 입술이 무중력 공간에 둥둥 떠다니듯이.


5_감독의 디렉션을 신뢰해야한다. 공동작업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하며 외곬으로 연기하려거든 내 돈으로 나만 보는 영화를 찍으면 된다. 몇 년 지나면 너도 안 볼테지만.


6_준비된 연기는 재밌다. 현장 사람들은 각각의 역할이 있고 소임에 충실한다. 그중 배우의 역할은 연기를 잘하면 된다. 보여지는 유일한 업이기에 배우는 체력적으로 특혜를 받는다. 그뿐이다. 우리는 모두 영화를 만드는 팀이고, 우리가 우리로 모여야 좋은 영화가 남는다. 항상 머리만 안다.



4.

깎는다.


진심으로 토해내는 것. 연기를 해도 시원하다 느끼지 못함은 두려움이 나의 숨통을 움켜쥐고 붙드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산의 시원함은 병아리가 막 달걀을 깨고 나와 더운 폐로 찬공기를 빨아드리는 것과 같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이래도 되나' 따위의 의구심을 떨치는 것이다. 진심으로 말해라 진심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그게 어렵다. 덜 깎인 것이다.


5.

작품을 대하는 나의 버릇은 마음에 드는 세 사람. 작가, 배우, 감독을 만나면 그의 연대기를 초기 작품부터 쭈욱 따라 올라가는 것. 질투가 옳겠다. 노란 조명 킨 작은 방. 갈색 블라인드 사이로 새벽빛이 은은하게 드는 곳에서.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초기작으로 경외와 조소를 보내는 게 나라는 인간의 모습이다.


최근 독립서점에서 구매한 서적이 맘에 들어 그가 쓴 대부분을 구입했다. 단 한 권도 학교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지 않아 난감했다. 지출의 이유는 그의 책에 담긴 문장 '신예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기억나지 않는' 라는 발칙한 고백 탓이다. 그의 초창기 책을 덮고 비슷한 감상을 받았다. 생각을 바깥으로 꺼내는 건 위험하다. 언제든 말을 아껴야겠다는데 또 한번 확신이 든다.


바깥은 캄캄하다. 네모난 검은 창이 어두워 나는 슬펐다. 노란 조명 탓이다. 흰 종이에 잠겨 가시성을 빼앗아 나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럼에도 저자는 무거운 엉덩이를 가졌을 것이다(웨딩사진 속 신랑의 모습은 말라보였지만 엉덩이는 가려져있었다). 망각에도 집중을 견인하는 무거운 엉덩이가 지금 내 마음이 붉은 이유다. 그에 비하면 내 엉덩이는. 한없이 가볍다. 가벼운 엉덩이로 무거운 엉덩이를 재단하는 한심함으로 나는 지출의 허기를 달래려든다. 질투는 나를 숨 쉬게 한다.


6.

전쟁 중에도 아이를 낳는다. 석류알처럼 터져나오는 참신함이 고깝다. 구 할은 샤워 도중 쏟아지는데 글감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잊어먹을까 구태여 물 뚝뚝 흘리는 번질거리는 손으로 메모할지 고민한다. 사우나에서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와, 물과 나체가 마찰하는 그 시점 탄생하는 글감은 여간 탐나는 글감이 아니라서 적지 않고 베길 수 없는 것이다. 오디션 불과 4시간 전. 이럼 안되는데, 하며 잊을까 머리에 물끼얹는데 또다시. 이기적인 아이디어가 머리를 두들기고. 지 멋대로 발아했다. 어쩔 도리없이 나는 그것을 메모했다. 생각은 나를 애먹인다.


7.

다이어리에 어제 밤 감독님 전화, 라고 갈겨 적혀있다. 다급했던 모양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8.

연기를 하며 생긴 습관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경계가 무뎌진다. 상상으로 떠올린 상황 따위가 재밌어 실제처럼 중얼거리면 과거의 내가 꽤나 진지하게 그것을 믿어버려서 현재와 미래의 나는 그것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갖는 것이다.  


9.

내가 완벽한 타이밍이라 생각할 때 그것은 안경에 김이 서리는 것과 같아서 사실 아무것도 아닌 자연스런 현상을 나 혼자만의 착각으로 끝나곤 한다. 그럼에도 번번이 오해하며, 믿고, 진실로 만드려 안간힘 쓰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나는 이천십삼 년. 그러니까 수능이 끝나고 대학생이 되었던 그 해 여름 라섹 수술을 했었다. 안경은 내 삶의 골칫덩이였다. 꽤나 장난기 많았던 유년기에는 스스로 사고를 키워 코가 깨지니 안경은 나를 위협하는 무기였고. 그보다 조금 나이 먹어 상상이 즐겁던 시절. 여자친구가 생기지 않는 이유가 양쪽 귀에 걸친 저 금속질 액세서리 탓인지 자꾸만 거슬렸다. 안경의 보조를 받으며 나는 그것을 떼어낼 궁리만 했다. 얼굴을 바로 씻지 못하게 막는 그것이 싫었다. 그래서 이천십삼 년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안경을 벗었다. 대학에 갔고, 첫 여자친구를 사겼다. 수술 회복기에 적잖은 고통이 따랐지만 그것쯤 참는 건 일도 아니었다.


수술로 되찾은 행운이 날 때부터 누린 특권이라 오해할 때쯤 눈에 김이 서렸다. 안경을 끼지 않아 나는 그것을 닦아낼 수 없었다. 작년 이천이십일 년에. 갑작스레 찾아온 시력 저하였다. 일쩜영이 영쩜사가 되기까지. 이십 년을 기다려 십 년을 안경없이 살던 내게 영쩜사는 버틸 수 있는 하한선이었지만. 상대 배우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감독님의 손짓은 거위의 날갯짓이 되어 얼굴이 묘사되지 않은 초상화 같아 나는 정말로 모두가 허연 거위로 보였다. 거위 속에 갇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황 모면을 위한 일상 속의 연기를 하는 것. 나는 멀리 떨어진 상대의 표정을 상상하고, 거위의 날개를 가진 당신이 그 얼굴이라 믿었다. 콧등에는 전보다 크고 못생긴 안경이 앉아있었다.


수술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보이는 척 연기할 것인가 혹은 안경을 인정할 것인가. 렌즈를 낄 수는 없었다. 라섹은 각막을 긁어내 굴곡을 만들어 안경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부스러진 각막에 살이 돋으며. 울퉁불퉁한 표면이 생긴다. 새살은 시력과 장애와 함께 핀다. 울퉁불퉁 장애로 렌즈를 낄 수 없었다. 또한 라섹 수술은 고통을 동반한다. 일주일 내지 열흘, 외부 활동 권고는 충고가 아니다. 내 시야처럼 흐릿한 기억이지만 1차 수술 후 3일간. 나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눈 감고 누워 울기만 할 것이다. 스무 살이 아닌 스물 아홉살에게 누워서 우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나는 1디옵터 안경이 코에 걸린 게 싫었다. 재수술을 결심했다.


스케쥴 조정은 어려웠다. 예약은 내 맘대로 이뤄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회복 기간은 절대적이고 나는 수거해야할 일이 많았다. 다음주에 수술 할 수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나는 전희를 느꼈다.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나를 위해 맞물린다. 수술 후 한 달 푹 쉬고 촬영에 들어갈 수 있는 스케쥴. 학교의 수업이 종료되는  다음 날. 회사 오디션도 단편 영화 리딩도 한 달 남는 수술 타이밍. 토니 스타크가 타노스를 소멸시킨 단 하나의 타이밍으로 수술 날짜가 잡혔을때. 나는 꿈을 꾸었다.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굴러가는 톱니의 운동감에 몸을 얹어 그 다음을, 그 다음만을 생각했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리라.


수술 당일 전화가 왔다.


"죄송해요. 원장님 어머니가 오늘 아침 상을 당하셔서 병원 내 모든 수술이 취소되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수술 네 시간 전 시작된 누군가의 장례. 스케쥴이 어그러지며 깊은 구멍을 냈고 내 마음은 텅 비었다. 무너진 시간을 재조립할 수 있을까. 나는 절대 안경을 벗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이 나를 삼킨다. 표표하게 흘러가던 삶은 안전불감증이었다. 눈에 선 김이 안개처럼 허옇다.


10.

정신의 허기가 현실의 궁핍을 넘어선 사람이 있다.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는 게 가난보다 아픈 사람들. 같은 부류의 금붕어가 담긴 어항을 보다가 뻐끔거리는 나와 닮은 금붕어를 발견했을 때. 나는 깜짝 놀라 어항을 멀리 던져버렸다. 쩍 파열음을 내며 어항이 깨졌다. 유난히 나를 닮은 금붕어가 숨을 헐떡였다. 눈맞춘 우리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들의 터전을 깨뜨린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은 치약을 짜내며 얻은 시원함과 통쾌함을 동시에 느꼈다. 지난함을 당연시 연설하는 사람들을 보면 달려들어 코를 깨부수고 싶은 충동이 든다. 나는 누군가의 돈벌이 어항에 갇혀 뻐금거리는 관상어 따위가 아니다. 속이는 사람도 속는 사람도 싫다.


연례 행사처럼 청소를 하다보면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앨범들에 시간을 뺏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앨범을 발견해도 펼치지 않는다. 표지를 넘기면 축사에 갇혀 꿈뻑꿈뻑 눈을 뜬 얼룩 송아지 사진이 있다. 송아지가 밉다. 송아지는 행복했을까. 무지와 무욕이 행복이 될 수 있을까. 내 안에는 의문으로 가득하다. 정답은 육지에 없다. 나는 바다로 간다.


삶을 0과 1의 잉크로 눌러 적으며. 올림픽 사이즈 수영장 50미터 레인에서 다리를 버둥거리는 나를 한  발 떨어져 기록한다. 글은 남는다. 봄에도 꽃 피지 않는 이유를 안다. 책임은 레인 끝을 찍고도 반대편 레인으로 나를 헤엄치게 만든다. 움직이는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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