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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Sep 28. 2020

다운타운의 빛과 그림자

아메리카 기행 - 로스앤젤레스 4

로스앤젤레스의 다운타운 지역은 그나마 마천루가 밀집되어 있어 대도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숙소에서 지하철을 타고 7th Street / Metro Center 역에 내리면 백화점을 비롯한 H&M, 유니클로 등 익숙한 브랜드의 쇼핑가가 펼쳐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뉴욕의 맨해튼을 연상시키면서 뭔가 근원적인 위로를 받게 된다. 아, 내가 그래도 도심의 인프라가 깔린 현대적인 곳에 와 있구나 하는.


로스앤젤레스의 도입부(시티 오브 엔젤 편)에도 썼지만, 이 지역은 무분별한 도시 확장(Urban Sprawl)으로 고층 건물보다는 저층 건물을 계속 지어 도시를 넓히는 데만 집중했기 때문에 스카이라인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그해서 대도시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빌딩이 몰려 있는 곳이 그나마 다운타운인데, 여기만 벗어나도 낮고 낡은 건물만 가득해서 도저히 도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빈한함이 왠지 나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이런 걸 보면 나란 인간은 대자연보다는 도시 여행이 어울리는 타입인가 보다.


그나마 숙소가 있는 코리아타운의 윌셔 대로에는 신문사나 방송사, 금융사 등 고층 빌딩이 꽤 들어서 있어 그 외로움이 좀 덜한 편인데, 그럼에도 숙소 근처보다 다운타운을 선호한 이유는 바로 중앙도서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중앙도서관은 언뜻 보면 겨우 2~3층 높이의 허름한 건물 같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지성과 감성의 산물이 들어 있다. 1층 로비에서 위로 올라가면 2층부터 3층에 이르는 다양한 갤러리가 이어지는데, 처음 들어보는 현대 작가들의 이색적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중 한 갤러리의 이름이 'Getty Gallery'인데, 게티는 이 일대에서 석유 사업을 했던 부호의 이름이며, 그가 남긴 거대한 빌라와 갤러리가 로스앤젤레스 외곽에 있다.


여기에 있는 전시실만 둘러보더라도 반나절이 훅 가버릴 정도인데, 자료실의 경우 지하 4~5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되어 있어 체감상 뉴욕의 공공도서관보다 더 방대하게 느껴졌다. 한국이라면 마냥 퍼질러 앉아서 책을 읽었겠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 서재의 스타일을 둘러보는 것에 집중했는데, 독서 공간이나 노트북 작업 공간에 파티션이 되어 있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공공의 장소에서 프라이버시를 이토록 존중받을 수 있다니 역시 미국답다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 옆으로 나 있는 Grand Ave를 따라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현대미술관과 콘서트홀이 모여 있는 Music Center가 나온다. 할리우드 영화와 함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한 로스앤젤레스는 타 도시에 비해 전시 공연 시설이 많은데, 투어는 각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신청이 가능하다. 이미 워싱턴에서 박물관을 실컷 보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작품 범위가 겹치지 않도록 설치 미술 위주의 The Broad를 예약했는데, 컬렉션이 상당히 독특했던 걸 보면 다른 현대미술관 MOCA(Museum of Contemporary Art)도 다녀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공연장 중에서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예약해서 다녀왔는데, 공연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시설만 둘러보는 거라 건축 알못인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원래는 입구 로비에서 무료 오디오 가이드도 대여해주는데, 마침 내가 갔을 때 기계가 다 떨어져서 설명의 부재에서 오는 상대적인 박탈감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부보다는 오히려 눈부신 금속 재질의 꽃을 연상시키는 외관이 훨씬 더 기억에 남는다.

뮤직 센터가 있는 언덕 지대에서 다운타운 쪽으로 다시 내려가기 위해서는 시청 앞으로 펼쳐진 Grand Park를 가로지르거나 Angels Flight Railway를 타는 방법이 있다. 둘 다 영화 <500일의 썸머>와 <라라랜드>로 유명해진 곳인데, 이 둘 중 하나를 추천하자면 앤젤스 플라이트를 택하겠다. 편도 $1인 세상에서 제일 짧은 이 철도가 주는 특별함도 있지만, 그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걸어서 내려와도 전혀 힘들지 않고, 시내 전망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앤젤스 플라이트에서 내리면 바로 맞은편에 Egg Slut과 G&B coffee 등 유명한 맛집이 몰려 있는 Grand Central Market이 보인다. 비록 에어컨도 없고 건물도 허름하지만, 선키스트 같은 태양을 피해 얼음이 가득 들어간 달달한 라테 한 모금 즐길 수 있다는 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만약 에어컨이 있는 쾌적한 실내 카페를 원한다면 그랜드 센트럴 마켓 뒤에 있는 브래드버리 빌딩 1층의 블루보틀로 가면 된다. (하지만 여기도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기 때문에 결코 앉아서 커피를 마신 적이 없다.)


브래드버리 빌딩은 영화 <500일의 썸머> 후반부에 나왔던 앤틱한 승강기와 계단, 그리고 유리로 덮인 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블루보틀에서 커피를 마시다 보면 내부로 연결된 문을 통해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문을 통과하면 바로 빌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영화를 차치하고라도 건축 시기가 19세기인 것을 감안하면 이만한 시간 여행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한 블록 뒤로 가면 The Last Bookstore가 나오는데, 이름 그대로 이 지구 상에 마지막으로 있을 법한 서점이 아닐까 싶다. 책으로 꾸밀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꾸며놓은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이는데, 그 모습이 썩 아름답진 않더라도 이런 공간을 무료로 세상에 내놓은 그 마인드가 참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다운타운의 감동은 거기까지였다. 시청 쪽으로 갈수록 눈에 띄게 불어나는 홈리스들을 보며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두려움을 느꼈으니. 여행에 관해서라면 웬만한 안 좋은 기억도 나중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법인데, 로스앤젤레스의 홈리스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 기억이 순화되기 어려울 것 같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거지가 인도만큼이나 많았던 곳이다. 인도나 아프리카나 원체 못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 거리에서 마주쳐도 티가 안 나지만, 미국은 다르다. 저렇게 삐까뻔쩍한 빌딩 사이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주얼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악취를 풍기며 거리를 활보하는 것만큼 언밸런스한 풍경이 또 있을까.


그중에서도 로스앤젤레스의 홈리스는 그 클라스가 남달랐다. 거리에 대놓고 텐트를 쳐서 그들만의 부락을 형성한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말을 걸기도 했는데, 잠깐 여행 온 나도 이렇게 불쾌한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심지어 시청 주위의 화단에는 꽃과 나무 대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홈리스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관공서마저 저 지경이니 정말이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는 홈리스 존을 스키드로(Skid Row)라고 부른다. 로스앤젤레스뿐만 아니라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에도 동명의 지역이 존재하는데, 뉴욕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묵었던 숙소에서 가까운 바워리 지역의 별칭이 바로 스키드로였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텐더로인과 시애틀의 파이어니어 광장 일대가 이에 해당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로스앤젤레스의 스키드로가 제일 위험했던 것 같다.


지도에서 보면 브래드버리 빌딩에서 불과 1~2 블록 거리에 스키드로가 있는데, 이 일대는 홈리스 텐트촌뿐만 아니라 마약이 거래되는 곳이기도 하다. 리틀 도쿄에서 브래드버리 빌딩을 찾아가는 길에 자욱한 연기와 함께 담배 냄새 같은 이상한 냄새가 계속 났었는데, 로스앤젤레스는 기호용 마리화나가 합법이라더니 여기가 바로 그 아지트인 모양이었다.


노숙자 문제는 미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 로스앤젤레스의 고질적인 고민거리가 되어왔다. 2019년도 노숙자 통계를 보면 뉴욕과 로스앤젤레스가 압도적인 수치로 1, 2위를 달리고 있는데, 그럼에도 뉴욕이 로스앤젤레스보다 덜 심각해 보이는 이유는 노숙자 쉘터에서 그만큼 수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 로스앤젤레스에도 노숙자 쉘터를 설치하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재정적인 문제와 위치 선정의 어려움 등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숙자는 왜 생겨나는 걸까? 미국의 주택도시개발부(HUD)에 따르면, 그 주요 원인으로 캘리포니아 지역의 심각한 주택난을 꼽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의 최저 시급 상승률이 주택 임대료의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해서 세입자들이 임대료를 못 내서 쫓겨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근의 실리콘밸리 등 산업 단지의 고소득자들이 이곳에 집을 얻고자 경쟁하는 과정에서 집값 상승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어찌 됐든 주거 환경이 불안정하면 직업이 있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이는 정신건강에도 영향을 미쳐 마약이라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하는데, 노숙자 관련 자료를 찾다가 특이하게 쉘터 입주를 거부하는 노숙자의 사연을 본 적이 있었다. 숙소를 제공해준대도 싫다니 도대체 그 이유가 뭔가 봤더니 익숙한 공동체를 떠나 새로운 집단에 가서 적응할 일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노숙자 개인의 심적 안정을 위해서라면 그 지역 주민들의 불편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가. 빈곤의 마인드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사회 질서를 위해 인권의 보장을 어디까지 해줄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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