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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Oct 03. 2020

미라클 마일에서
로데오 드라이브까지

아메리카 기행 - 로스앤젤레스 5

뉴욕의 박물관 마일(Museum Mile)과 워싱턴의 내셔널 몰(National Mall)처럼 로스앤젤레스에도 '미라클 마일(Miracle Mile)'이라는 박물관 특화 지구가 있다. 이는 다운타운 편에 썼던 전시 공연장 위주의 뮤직 센터(Music Center)와는 그 성격이 다른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옛날 역사부터 미술, 산업 등 전반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이 몰려 있는 곳이다. 여기가 다운타운의 뮤직 센터와 비교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입장료가 있다는 점이다. 보통 10~20$ 수준으로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박물관 마니아라면 하루에 십여 만 원은 거뜬히 깨질 각오를 하고 가는 것이 좋다.


이미 워싱턴에서 박물관을 테마로 둘러봤고, 다운타운의 뮤직 센터에 있는 현대미술관도 가봤으니 미라클 마일은 그냥 건너뛸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의 유명한 재래시장인 파머스 마켓이나 댄디한 패션 거리 멜로즈 애비뉴를 가려면 어차피 여기를 거쳐야 했고, 무엇보다 미라클 마일의 상징인 LACMA(LA County Museum of Art)의 특이한 조형물 사진이 나를 무척이나 설레게 했는데,

바로 1920~30년대의 가로등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어반 라이트(Urban Light)'였다. 언뜻 보면 같은 종류의 가로등을 모아둔 것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살펴보면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 크리스 버든(Chris Burden)은 주로 벼룩시장 같은 데서 옛날 가로등을 수집했는데, 16가지 타입의 202개에 이르는 가로등을 모으기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결과 100년 전에는 거리를 밝히는 것에 불과했던 가로등이 이제는 이 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예술 작품으로 승화된 것이다. 가로등 계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나 할까.


어반 라이트를 보고 있으면 일종의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겉으로는 이보다 더 질서 정연할 수 없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 다양성과 아기자기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이렇게나 다양한 저마다의 개체가 모여서 '조화로운 단체'를 이룰 수 있다니. 이는 마치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사는 미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는 듯했다. 역사 속으로 그냥 사라졌을지도 모를 옛것에 이만한 상징성을 부여하기까지 작가의 고뇌는 또 얼마나 깊었을까. 이것만으로도 '미라클 마일'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은 곳이다.

미라클 마일에서 Fairfax Ave를 따라 걷다 보면 전통 먹거리 시장인 Farmers Market과 명품 거리 The Grove와 저렴한 아웃렛 Ross가 한자리에 모인 거대한 쇼핑지구가 나온다. 좌석이 편해 보이진 않지만, 시장 안으로 들어가서 가판대에 진열된 컵케이크나 과자를 찬찬히 둘러보고 시식도 해본다. 쇼핑에는 관심 없지만, 귀국할 때를 대비하여 기념품샵의 아이템도 체크해두고, 명품샵도 잊지 않고 들러 본다. 평소에 안 하던 걸 해보는 것도 여행의 매력이 아니겠나.

계속해서 Fairfax Ave를 따라 Melrose Ave까지 걸어가 본다. 패션의 거리라는 이곳의 로드샵은 지나치게 아메리칸 스타일이어서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고, 뜨거운 태양을 피할 공간조차 마땅치 않아서 무더운 날씨에 더욱 지치게 했지만, 그 와중에 이런 선명한 색상의 벽화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의외의 발견이었다. 보는 눈이 즐거우면 없던 기운도 생기는 법.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그러고 보면 물건을 진열해놓은 상점이나 거리의 예술이나 모두 박물관의 갤러리와 다를 바 없는 전시 예술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로스앤젤레스는 '미라클 마일'을 여기까지 확장해도 좋지 않을까.

내친김에 부촌으로 소문난 비벌리힐스(Beverly Hills)까지 가 본다.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들을 비롯한 대부호들의 저택이 많다고 하는데, 정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담장이나 나무에 가려서 집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대신 근처 마트에서 아주 반가운 사진을 발견했다. 바로 이 동네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1990년대 드라마 <베버리힐스의 아이들>이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에 다녔었고, 이 언니 오빠들의 삶이 전혀 공감이 안 됐음에도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어른이 된 내가 먼 이국땅에 와서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다니, 마치 고향 선배라도 만난 것처럼 한없이 반갑다.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인데 이 거리는 이분들의 리즈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벌리힐스에서 로데오 드라이브(Rodeo drive)로 들어가는 길은 루이비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끝은 포시즌 계열의 럭셔리한 호텔 Beverly Wilshire로 마무리된다. 줄리아 로버츠를 좋아하지만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가 식상해서 별로였던 영화 <귀여운 여인>의 주무대가 바로 여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분명 2019년도의 로데오 드라이브를 걷고 있는데, 1990년에 나온 영화 <귀여운 여인>의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이 거리는 그동안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일까.


한국에도 한때 같은 이름의 패션 스트리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압구정 로데오 거리다. 일명 오렌지족과 야타족의 성지였던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비벌리힐스의 로데오 드라이브를 표방하면서 고급 브랜드가 입점하고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까지 생겨났지만, 언제부턴가 그 유행이 '~리단길'로 바뀌어버렸다. 로데오 거리가 패션과 브랜드에만 특화된 데 비해, 리단길은 먹거리부터 그 지역의 특색까지 모두 담아낸 복합 문화 공간이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이 리단길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최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다시 한번 성장통을 겪고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왜 가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미라클 마일의 어반 라이트에서 느꼈던 감동처럼 내 취향과 부합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얻을 수 있고, 나를 성장시킬 수 있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그 장소를 찾게 되어 있다. 그동안 그 많은 명소에 사람들이 다녀갔음에도 왜 다시 찾는 사람은 얼마 없는 걸까. 바로 메시지의 부재이다. 장소는 사람이 오게 하는 방편일 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전달해줘야 하는 것이다. 바로 며칠 전에 방영됐던 KBS의 '2020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에서 우리는 경험하지 않았던가. 한 사람의 희망적인 메시지가 주는 힘이 그토록 엄청나다는 것을. 아마 다음에도 그의 콘서트가 열린다면 우린 주저 없이 그를 찾게 될 것이다. 설사 거기가 초호화 쇼핑가 로데오 드라이브든 거의 5년 단위로 성장통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어느 리단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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