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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Nov 08. 2020

미국의 발견, 여행의 발견

아메리카 기행 에필로그

시애틀에선 비가 참 많이도 왔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더운 여름에 시애틀에서 시작하여 가을에 뉴욕에서 마무리하는 루트는 어땠을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지금 가장 시애틀다운 날씨를 경험하고 있지 않나, 뉴욕의 가을도 멋있었겠지만 한여름의 뉴욕도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미국의 도시들과 나는 각자가 가장 나다운 모습일 때 시절인연으로 만났다.


미국 편의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그 당시의 나는 몹시 상처 받고 영혼이 고갈된 상태였다. 이제 마흔을 넘긴 나이에 무슨 슬럼프가 3번씩이나 오냐며 한탄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피하지 않고 슬럼프를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쉽고 익숙한 방법만 찾으려 했던 안일한 내가 보였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는데 익숙한 과거에 사로잡혀서 꼰대처럼 머물려고 했으니 도태되는 게 당연했다.


도저히 지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생각한 것이 여행이었다. 인생에서 한 번씩 고비가 올 때마다 장기여행을 떠났고, 그때마다 확실한 답을 들고 온 건 아니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야를 배워왔다. 지겹도록 혼자 있는 시간들도 좋았다. 나는 지금 무엇보다 그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서 나를 돌아보며 내 안에서 보내오는 시그널을 읽고 싶었다.


목적지를 미국으로 정한 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여행이 하고 싶어서였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유적지나 대자연의 보고가 아닌, 선지식들이 이끄는 내적 수련 같은 건 더더욱 아닌, 철저하게 자본주의로 무장된 경제대국에서 한껏 자극받고 싶었다. 세계경제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한번 보고, 다양한 인종들 간의 휴머니즘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기에는 뉴욕만 한 도시가 없을 것 같아 한 달을 살아보기로 했고, 그 외 수도인 워싱턴과 몇몇 소도시들을 지나 서부의 3대 도시에서 한 달 반을 더 보내보기로 했다.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민자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재능과 콘셉트로 각자의 신도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는 경제의 중심지 뉴욕,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 워싱턴, 세계 최강의 군사도시 오클라호마, 자본주의의 끝판왕 라스베이거스, 세계 최대의 이민족 커뮤니티가 만들어낸 영화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골드러시와 함께 성장하여 IT 산업의 중심으로 우뚝 선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거지들을 보았고, 원주민 박해의 슬픈 현장을 목격했으며, 세계 최대의 이민족 커뮤니티 간의 불협화음은 여전히 진행 중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모범 이민사회로 칭송받던 한인 사회는 20세기쯤에서 발전이 멈춘 듯했고, 고속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시스템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머물러 있었다.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게 극과 극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내가 가본 곳은 고작 일곱 도시에 불과하지만, 각각의 모순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마무리되는지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동안 세계 각지에서 단편적으로 습득했던 지식이 인류의 모든 역사가 마지막으로 집결된 미국으로 수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편린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세계를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미국에 오게 된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 이걸 해야겠다'라는 구체적인 계획이 떠오른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미국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깨졌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찼으며, 그 정보들이 그동안 쌓였던 지식의 조각과 융합되는 과정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세계관이 정립되는 것을 느꼈다. 이를 밑거름 삼아 다가오는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여행하는 순간이 아니라 다녀온 후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것 같다. 그 1차적인 보고서로 이 기록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글이 미국이라는 사회를 이해하고 여행관을 정립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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