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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Nov 06. 2020

기업하기 좋은 도시

아메리카 기행 - 시애틀 6

어떻게 하면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2003년의 어느 날, 구글 캠퍼스를 산책하던 한 엔지니어는 문득 남은 생을 세계 평화에 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그날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는데,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어떤 일에 평생을 바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냐고, 그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 그랬다고 한다.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 그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세계 기아를 없애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그중 빈곤 문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이미 나서고 있으니, 자신은 두 번째 문제인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이 엔지니어의 이름은 차드 멍 탄(Chade-Meng Tan)이며, 그가 마음의 평화를 전도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 바로 구글 명상 프로그램인 '내면검색(Search Inside Yourself)'이다.


이공계의 진수들만 모여 있는 회사에서 일개(?) 엔지니어가 어떻게 이런 범세계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의 감성 지능을 이토록 자극시켜준 것일까? 물론 차드 멍 탄은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불교식 명상 수련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그렇기에 마인드 컨트롤에 누구보다 익숙할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자신 없는 외모와 소심한 성격 탓에 청년기에는 수없이 방황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세계 평화를 위한 연민(Compassion)의 감정을 품을 수 있었던 데에는 구글의 '인간적인' 기업 문화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구글에서는 근무 시간의 20%를 개인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그 20%의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며 구글 명상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구글 본사에 해당되는 얘기지만, 시애틀에서 우연히 구글 캠퍼스에 들렀던 나는 회사 건물 뒤로 흐르는 운하를 따라 조성된 멋진 산책로를 본 순간, 차드 멍 탄의 사연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건물이 마치 대학 캠퍼스처럼 모여 있는 이곳엔 시애틀의 상징인 물길이 흐르고 있어 그 아름다움이 배가되는 것 같다. 이 물길은 시애틀 북쪽에 있는 유니언 호수에서 흘러나온 프리몬트 운하(Fremont Cut)로,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관문이기도 하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 산책로에서는 무얼 생각해도 좋지 않겠는가.


운하를 중심으로 구글 캠퍼스가 있는 북쪽 지역을 프리몬트(Fremont)라고 하며, 시애틀 시내에서 오다 보면 운하 위로 다리 하나가 연결되어 있는데, 왼쪽으로는 구글, 오른쪽으로는 어도비가 보인다. 늘 접해왔던 제품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비롯되었음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여기를 시작으로 Allen Institute for Brain Science, SDL PLC, Groundspeak, Impinj, Sporcle, Tableau Software 등 꽤 많은 IT 기업이 프리몬트 운하를 따라 위치하고 있다. 이쯤 되면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IT 허브 도시라 할 만하지 않은지.


시애틀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MS는 시애틀 근교의 레드몬드(Redmond)라는 곳에 있어 시내에서 가는 교통편이 좀 복잡하다. 이는 구글 본사가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근교의 실리콘밸리에 있어 대중교통으로 한 번에 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내 죽순이인 나는 끝내 이 근교에 있는 전설의 기업 본사들을 방문하진 못했지만, 대신 프리몬트에서 이곳만의 기업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프리몬트는 구글 때문에 온 게 아니라 힙스터들이 모여 '우주의 중심'이라는 콘셉트 아래 개성 있게 만들어낸 예술 공동체의 분위기가 궁금해서였다. IT 기업이 포진해 있는 프리몬트 운하에서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우주선을 시작으로 각종 행성 모양의 조형물이 건물마다 매달려 있는데, 그 중심에 뜻밖에도 레닌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유의 땅에 이념 전쟁의 잔재가 전시되어 있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알고 보니 이곳 프리몬트 지역은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이주한 곳으로, 20세기 초반에는 좌파운동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러시아에서 숱하게 봐온 당당한 풍채의 레닌 동상과 달리, 후줄근하면서도 어딘가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념의 냄새가 많이 씻겨나간 듯한 인간적인 레닌의 모습이 힙한 프리몬트 분위기와 은근 어울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프리몬트의 하이라이트는 시애틀 시내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다리인 오로라 브리지(Aurora Bridge) 아래 숨어있는 트롤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인기 있는 북유럽 신화 속의 괴물 무민(Moomin)의 원래 모습이 이러하지 않을까 잠시 상상해 본다. 그나저나 이런 고가도로 아래 누가 본다고 저런 걸 만들어놓을 생각을 했을까. 시애틀은 도착할 때부터 계속 느끼는 거지만, 거리의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도시인 것 같다. 하물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이런 공간조차 예술의 혼이 숨 쉬는 걸 보면.

다시 다리를 건너 시애틀 시내로 돌아오는 길, 유니언 호수를 돌아 수상가옥이 바라보이는 곳에 잠시 멈춰섰다. 이 근처 어딘가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나왔던 톰 행크스의 집이 있을 것만 같아서.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시애틀은 어촌을 겸비한 아주 작은 지방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개봉 시기보다 무려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시애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도화되어 있으면서도 오랜 전통이 공존하고 있었다.


커피 문화의 혁신을 일으킨 스타벅스를 품고 있는 100년 묵은 재래시장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 그러하며, 시애틀 추장님이 지키고 있는 파이어니어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인터넷 쇼핑몰 업계 1위인 아마존 본사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숲과 호수와 바다로 둘러싸여 '에메랄드 시티'라 불리는 이 고즈넉한 도시의 한쪽에는 IT 기업들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그 주위로 마이크로소프트와 보잉 컴퍼니가 수호하고 있는 시애틀. 이제는 바이러스가 몰고 온 브이노믹스(V-nomics) 시대를 맞아 또 한 번 혁신의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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