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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Aug 28. 2023

비 오는 날의 수수부꾸미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셨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한 건 이젠 호호할머니가 되어 버린 어머니의 손맛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엄마밥이 최고의 진수성찬이듯 내게도 그러했다. 엄마의 음식우리 가족뿐 아니라 어릴 적 동네 아주머니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남다른 맛을 자랑했다.


오죽했으면 이웃에 조금씩 나눠주신 동치미와 배추김치가 입소문이 나서 돈을 주고 사가겠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손맛은 아마도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으신 것 같다. 언젠가 이모에게 듣기로 외할머니는 그 없던 시절(1950년대)에도 음식을 참 맛있게 하셨다고 한다. 식재료가 충분치 않으니 구할 수 있는 것들로 대충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무치셨는데도 그렇게 맛있었다고.


이런 손맛을 지닌 엄마도 세월 앞에서는 어쩌실 수 없는 깊고 깔끔한 맛을 자랑했던 예전의 엄마표 음식을 맛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후 아빠와 두 분이서 단출하게 식사를 차려드시다 보니 손 많이 가는 음식은 잘 안 하게 되신 데다 각세포도 점점 퇴화해서 연스럽게 그리 될 수밖에 없었겠지.


이젠 식들에게 바리바리 싸 들려 보낼 반찬 만드시기에는 힘에 부치는 나이가 되셔 당신들 드실 것만 조금씩 만드시라고 말씀드리고 있지 가끔은 어린 시절 엄마의 밥상 앞에 앉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예년에 비해 긴 장마로 비가 많이 내린 올여름엔 엄마가 부쳐주시던 수수부꾸미가 자주 생각났다.


수수가루와 찹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개어 익반죽 한 팥소를 올리고 반달 모양으로 접어 기름에 지져낸 이 부꾸미는 설레는 마음으로 비 오는 날을 기다리게 만들던 별식이었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기름냄새와 지글거리며 전 부치는 소리는 비 오는 날의 운치를 한껏 끌어올렸고 "자, 얼른 먹어." 소리와 함께 접시에 담겨 나온 반들반들한 기름옷을 입은 부꾸미는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리게 만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전을 좋아해서 엄마는 날씨와 상관없이 평소에도 김치전, 해물전, 감자전 등 다양한 부침개를 해주셨지만 유독 이 수수부꾸미는  날에 맛볼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팥을 삶아야 해서 다른 부침개보다 손이 많이 가는 게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요즘은 동네에 전집이 많아져서 굳이 집에서 전을 부치지 않고도 손쉽게 다양한 부침 요리를 맛볼 수 있지만 수부꾸미는 여전히 메뉴판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가끔씩 부꾸미를 파는 음식점을 견하면 반갑기 그지없다. 그날이 비 오는 날이라면 더더욱.


몇 달 전 부모님을 뵈러 갔을 때가 떠오른다. 아침부터 굵은 장대비가 쏟아져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날이었다. 친정집 근처에 유명한 감자옹심이 전문점이 있어서 점심을 먹기 위해 부모님을 모시고 갔는데 메뉴판에서 반가운 글자를 발견했다. 바로 수수부꾸미였다. 옹심이 칼국수에 곁들여먹을 요량으로 한 접시를 주문했는데 엄마가 너무 맛있게 드시는 것이었다.


'엄마도 부꾸미를 좋아하셨구나.'


엄마의 식성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부꾸미를 좋아하시는지는 몰랐다. '이렇게 잘 드시는데 먹성 좋은 자식들 챙기시느라 자신 몫의 한 접시를 온전히 맛볼 여유가 없으셨구나'. 아이 셋을 건사하느라 아등바등하며 사신,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그 시절의 엄마가 떠올라 코끝이 시큰해졌다. 


알았으면 진작 더 자주 모시고 왔을 텐데 평소에 가족 외식을 할 때 뭐 드시고 싶냐 여쭤보면 항상 너희들이 좋아하는 거 먹자,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그동안 다른 가족들 입맛에 맞춰 메뉴를 골랐기에 엄마의 취향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엄마가 좋아하시는 줄 알고 있었던 해물탕과 보쌈도 진짜로 좋아하시는 게 맞는 잘 모르겠다. 나름 자식 노릇 하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보면 무심한 딸인 게 티가 난다. 누구를 안다는 건 함께 해온 시간의 양에 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게 모녀지간이라도 말이다.


수수부꾸미를 드시는 엄마를, 부모님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순간도 훗날 그리움으로 떠올릴 추억이 되겠지, 동생들과 부꾸미를 먹으며 함박웃음을 짓던 어린 날처럼. 남은 날들이 지나온 날들보다는 짧겠지만 부모님을 좀 더 알아가는 간들로 밀도 있게 채워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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