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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May 12. 2023

이런 독서모임 보셨나요?

삼십 대에 꿈꾸던 나의 '북 앤 더 시티'


드르륵! 카톡 진동이 울린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들 사이로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이름이 눈에 띈다.


십오 년 전쯤 일요일 오전에 만나는 여자들만의 독서모임을 운영한 적이 있다. 당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 심취해 있던 때라 뉴욕의 멋진 그녀들처럼 주말에 만나 브런치를 즐기며 책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었으면 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로 구성된 모임을 원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길래 내가 만들었다.


리더십과는 거리가 먼 내향형 인간인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외향성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몇 명이나 참석할까 싶었던 걱정무색할 정도로 많은 멤버들이 모여 성황리에 모임이 시작되었다.


동그랗고 큰 눈을 빛내며 롱런하는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A는 모임에 열심이었다. 매주 지정된 도서를 읽고 주말에 만나 토론을 벌이던 빡빡 일정이었는데도 거의 매번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A 외에도 S, Y, B 등 모임에 열성적이던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등을 함께 읽으며 뜨거운 토론을 벌이던 삼십 대의 날들이 지나갔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것처럼, 일 년 넘게 지속되던 모임은 직장일과 개인 사정으로 멤버들이 바빠지면서 차츰 긴장을 잃고 느슨해졌다. 그렇게 독서모임에서 수다 모임으로 변해갔고 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다 어느 순간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런데 오늘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A가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책꽂이에 꽂힌 책을 볼 때마다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는 그녀의 말은 빛나던 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몰고 왔다. 나 역시 그때 읽었던 책들을 아직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거실 벽 한 면을 가득 채웠던 책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지만 모임의 추억이 담긴 도서들은 손대지 않아 아직도 고스란히 책장에 놓여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만큼 열정을 바쳤던 이 또 있을까. 책이 좋았고 만남의 자리가 좋았던 시간이었다. 물론 사람 간의 관계이다 보니 간혹 마찰도 있었지만 지나고 그런 것들은 다 잊히고 이제는 좋은 기억으로만 남았다.


예전이 그립고 덕분에 즐거웠고 애 많이 썼다는, 과거의 같은 시기를 그리워하는 이가 전한 따스한 안부 덕분에 빛바래어 가던 기억이 선명함을 되찾고 살아났다. 서로의 근황을  갱년기 증상을 호소하다 다시 만나자는 기약을 끝으로 대화를 마쳤다. 


뜨거운 토론과 사는 이야기가 테이블 위를 오가던 삼십 대의 '북 앤 더 시티'. 불교의 '시절 인연'이라는 말처럼 그 시기에 서로 간의 때가 무르익어 만나게 된 사이였으리라. 


오늘의 대화 덕분에 새로운 눈으로 일상을 살피게 된다. 지금 나의 시절 인연과 내가 몰입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일에 대해. 이 시기도 지나고 나면 회상할 날이 오겠지. 


좀 더 마음을 다해 밀도 있는 시간들로 하루를 채워가야겠다. 나중에 지금을 떠올릴 때 아쉬움보다는 만족감이 크길, 그리고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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