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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May 10. 2024

내가 내려놓을 물고기는 무엇일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뒤늦게 읽고


수많은 언론 매체의 찬사를 받은 이 책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보려 했으나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자연 과학서인지 감 잡을 수 없는 표지 위에 적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괴상한(?) 제목 때문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런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걸까,라는 궁금증에 결국 책을 펴 들게 됐다.



저자인 룰루 밀러는 한순간의 잘못으로 연애에 종지부를 찍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 깊은 좌절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방법을 찾던 중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생물 분류학자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


지진으로 평생에 걸쳐 수집한 유리병 속 어류 표본들이 한순간에 파괴되었음에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물고기의 이름표를 꿰매 붙이는 학자 조던. 그를 보며 저자는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해답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이 생물학자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저자와 함께 조던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나 역시 내 인생을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어줄 어떤 비법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집중해서 글자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낙천성의 갑옷을 입고 삶의 위기를 돌파하며 승승장구하는 이 인물에게서 호감을 느끼기보다는 왠지 께름칙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가끔은 과학이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될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중반부터 갑자기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충격적인 전개가 펼쳐지며 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스포가 될까 봐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못하지만 조던의 삶을 보며 신념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과학이 진실을 밝히는 횃불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굳건한 믿음을 깨뜨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강이나 바다에 사는 지느러미를 가진 수많은 생명들은 그저 서식 환경이 같아서 겉모습이 비슷해졌을 뿐 그 조상은 모두 다른데, 인간이 마음대로 '어류'라고 정해버렸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며 우리가 임의로 분류한 세상의 범주에 대해 의심하는 눈을 갖게 한다.


놀라운 건 분기 학자들의 집요한 연구 덕분에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밝혀냈음에도 학계 밖에서는 아직도 그 범주가 통용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에겐 진실보다는 편리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객관적 사실로 밝혀진 것조차 이렇게 바로잡기가 어려운데 또 어떤 잘못된 범주들이 진실로 둔갑해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을까.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 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 560p


이 세상엔 물고기 말고도 인간이 편의상 정해놓은 수많은 범주들이 존재한다. 그건 어류, 포유류 등 생물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인간은 심지어 같은 인간에게조차 기준을 두어 경계를 가르고 구분 짓고 때로는 '부적합' 판정을 내리기도 한다.


어느 인간이 열등하고 우월한지 나누는 우생학, 지금은 다른가


이 책에도 등장하지만, 19세기말의 미국과 유럽에는 '우생학'의 광풍이 몰아쳤다. 우생학은 유전 법칙을 응용해서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학문이다.


더 우월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도태될 듯한 유전자부터 제거해야 했다. 그래서 '사회적 기준 미달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수용소에 감금하고 강제로 불임 수술을 단행했다. 그 대상에는 성매매 여성, 범죄자, 장애인, 유색인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이를 단지 옛날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신체장애나 지적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부적합' 딱지를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 격차에 따라 수저 색깔로 계급을 나누거나 고용 형태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 지어 차별하기도 한다.


이런 편 가르기가 아직도 만연한 세상에서 저자는 경계를 넘어 열린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볼 것을 권유한다.

 

"저의 바람은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난 뒤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 룰루 밀러


'민들레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책에서도 나오듯,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그저 잡초에 불과하지만 약초를 채집하는 사람에게는 약재가 될 수도, 화가에게는 염료가 될 수도 있다. 또 곤충들에게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잣대로 그 효용을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다른 이에게 함부로 부적합,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의 척도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고 다각도로 살펴볼 때 우리는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중략)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 560p, 561p


자신을 옭아매던 범주에서 벗어나자 저자는 기존과는 다른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꿈꾸는 인생'이라고 믿었던 틀을 깨고 나오자 그동안 몰랐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새로운 행복을 찾게 된 것이다. 경계 안에 머무르기보다는 혼돈으로 가득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쪽을 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저자는 민들레의 법칙을 통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 479p


우주에서는 그저 티끌에 불과한 인간이, 어떤 이에게는 생을 살아갈 이유이자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된다.


한 인물에 대한 평전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한 이 책은 19세기 인물의 삶과 자신의 인생을 비교하며 갇힌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실을 깨달아가는 한 저널리스트의 여정을 담고 있다.


출처 : 픽사베이


책을 읽으며 또 어떤 물고기가 우리 주변에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얼마 전 지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동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닌, 보호해야만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건, '보호'의 껍데기를 썼음에도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차별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도 그런 잘못된 시각에 오래 갇혀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는 이러한 장애인에 대한 인식 역시,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물고기가 아닐까.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서로 포용하고 다름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받아들이는 세상에서 각 개인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로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구분 지은 선들 너머의 세상을 보는 것. 보다 넉넉한 품을 가진, 따뜻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해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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