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21명의 작가들이 쓴 <소설, 한국을 말하다>를 읽고
굵어진 빗방울이 내 정수리와 이마를 때렸다. (중략) 설마 우산을 사려는 건가? 나는 황급히 언니를 뒤따라갔다. 거지방 참여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지출을 언니가 저지르려 했다. 비 맞기 싫어서 우산 사기. 거지방 참여자들은 입 모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냥 맞으세요. 비 좀 맞는다고 안 죽어요.' (중략) 장대비가 땅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옆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언니가 나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우산 사줄 테니까 쓰고 가." 나는 극구 만류했다. 그러자 언니가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우산 좀 산다고 네 삶이 망해?" 나는 온 세상이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어. 우리는 망해. 쫄딱 망한다고!"
- <소설, 한국을 말하다>, 이서수 '우리들의 방' 중에서
전염병이 휩쓴 세상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했다. 한쪽에선 경기가 어렵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지만 어떤 이들에겐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중략) 해외로 나가는 발길이 묶이고, 가시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자랑거리들에 제한이 걸리자 명품 시장은 보복 소비라는 말 아래 날로 비대해졌다. 보복 소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수민은 그 말을 만든 사람에게 보복하고 싶었다. 보복할 게 없어서 돈으로 뭔가를 보복하다니. 이보다 더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세계는 분명히 실재했다.
- <소설, 한국을 말하다>, 손원평 '그 아이' 중에서
감시카메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윤애는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다. 스마트시계가 더 거세게 울린다. 해가 뜬다. 곧 있으면 해가 뜬다. 어물쩍거리다 해가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거란다. 그렇게 말한다. 윤애의 걸음이 더뎌진다. 잘못 디뎌서 넘어지신 거겠지. 잠깐 기절한 거겠지. 곧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겠지. 그러니 돌아가야 한다. 윤애는 새벽이 지나기 전에 배달을 마쳐야 했다.
- <소설, 한국을 말하다>, 천선란 '새벽 속' 중에서
어떤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때 더욱 명징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그 필요와 가치가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을. 그러니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세태에도 아랑곳 않고, 보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일에 성실하게 복무하는 이들ㅡ우리의 작가들!ㅡ은 얼마나 소중한가.
- <소설, 한국을 말하다>, '기획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