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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Mar 14. 2024

함께 키우고 있습니다만

워킹맘은 어느 순간에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둘째를 낳았을 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이직을 하기 전이었지만, 그때도 이미 업무량이 적지 않았고, 해외 출장도 잦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어떻게~?"이다. 예를 들면, 회사에 가면 "어떻게 아이를 셋 낳고 로펌에서 일하세요?"라는 질문을 듣고, 아이 학교에 가면, "어떻게 로펌에서 일하면서 아이를 셋이나 키우세요?"라는 질문을 들으며, 주말에 골프 라운딩을 가거나 하면 "어떻게 애가 셋인데 골프를 치러 나오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식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질문자의 의도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은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전제에서 내 대답은 대체적으로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친정 부모님이 아이들을 알아서 다 키워주시는구나'. 또는 '집에 입주 이모님이 알아서 키워주시나 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지인과의 모임에서,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일하면서 애를 셋을 낳았느냐라고 묻자, 다른 지인이 "얘는 친정부모님이 애들을 다 키워주시잖아"라고 대신 대답해서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보다.


하지만 실제 나의 현실은 많은 분들이 큰 품과 작은 품을 모아 아이 셋을 키워가는 그런 형국이다.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면서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나는 내 자식들을 낳아 내 주변에 계시는 여러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키우고 있는 셈인데, 뻐꾸기도 아니고 염치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함께하는 방식은 첫째, 둘째, 셋째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변형 및 진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해서 이 글에서 조금 나누어 보고자 한다. 


지난 10년간의 육아 생활을 되돌아보았을 때, 내가 큰 공백 없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우미 역할을 자처한 분들은 우리 친정 부모님이시다. 우리 부모님은 스스로 아이를 셋을 낳아 키우실 만큼 아이를 무척 좋아하시는 분들이시다.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아빠는 아직 일을 하셨고, 엄마 역시 종교 및 취미생활로 바쁘게 일상을 보내고 계신 상태였다. 당시 나는 너무나 간단하게, 내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 엄마가 아이를 봐주시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하루 8-9시간 동안 신생아와 분투를 벌이면서 포기하여야 할 엄마의 일상에 대해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내가 첫째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회사에 복귀하자, 우리 엄마는 아기와 함께 긴긴 하루를 보냈고, 날씨가 따뜻한 날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내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마중 나오셨다. 버스에 내려서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오는 나를 보면서 엄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을 것이다. 엄마는 나의 퇴근 이후에도 나의 식사 등을 살펴주시며 조금 더 늦은 시간에 퇴근하시면서 주 52시간을 넘는 많은 시간을 황혼육아에 쏟아부으셨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 첫째가 친정 집안의 첫아기인터라, 근처에 살던 언니도, 동생도 시간만 나면 우리 집에 와서 아기와 놀아주고, 도와주고, 엄마의 말벗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엄마의 각고의 희생으로 1년 남짓의 간은 힘들게 지나갔고, 나는 첫째의 돌이 지난 후 다가오는 3월에 바로 동네 가정 어린이집으로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친정엄마에게 몰빵하는 이 육아방식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다.  


우리 둘째는 언니가 쌍둥이를 낳은 지 백일이 된 시점에 태어났다. 엄마는 두 집을 오가며 이것저것 살펴주셔야 했고, 첫째처럼 친정엄마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나는 6개월만 쉬기로 회사에 통보해 놓았던 터라 어린이집에 다니는 첫째와 신생아 둘째를 돌보며 이런저런 고민을 한끝에, 복귀 이후 시부모님이 일주일에 3일 아이들을 돌봐주시고, 나머지 2일은 친정부모님이 돌봐주시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당시 시부모님은 무려 세종시에 살고 계셨지만,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며느리의 커리어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위해 세종시와 수도권인 우리 집을 오가는 생활을 감행하셨다. 둘째 역시 돌이 지나고 돌아오는 3월부터 첫째가 다니던 동네 가정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이 시기에 아이들은 시부모님을 세종할머니, 세종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시부모님과 돈독한 애정을 쌓아나갔다.  


셋째의 경우, 첫째, 둘째가 어느 정도 큰 상태에서 태어 낳지만, 나는 승진을 앞둔 해여서 3개월 이상 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친정부모님은 이미 큰 아이들을 돌보고 계셔서 두 분께 신생아 케어까지 추가로 맡기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지인분께서, 본인의 셋째를 봐주시던 이모님이 계신데, 혹시 소개가 필요한지 먼저 물으셨다. 평소에도 인품이 좋은 분이셨고, 무엇보다 본인의 아이를 봐주시던 이모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다 싶어서 무조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이모님을 뵈니 역시 취미활동 등이 있으셔서 다소 유연한(?) 근무를 희망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이모님이 못 오시는 날에는 친정 부모님이 메꿔주셔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조금 고민이 되었는데, 이모님을 직접 만나보신 부모님께서는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으시다며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만난 이모님은 우리 집안의 소중한 은인이 되어 셋째가 올해 3월 어린이집을 가기 전까지 셋째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고 이모님이 오실 수 없는 시간에는 이미 몇 년 전 은퇴하신 친정아버지께서 막내를 주로 돌보아주셨다. 아직까지도 우리 막내는 '하부'를 제일 많이 찾는다.


누군가가 보면, 어떤 운 좋은 엄마가 친정부모, 시부모, 이모님을 잘 만나서 편하게 애를 키웠구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여러 분들과 함께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자주 울고 웃었다. 일정이 꼬이기도 하고, 양육방법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가끔은 말 못 할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내가 전적으로 육아를 하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여러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여러가지가 꼬이는 일이 종종 있었고 잠시 시간을 내어 풀고, 또 꼬이면 또 푸는 식으로 하나둘씩 해결해야 했다. 이제는 전우애 비슷한 감정까지 들정도로 믿고 맡기는 사이가 되었지만, 오랜 시간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아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위태로운 신생아 시절을 낸 후에는, 동네 어린이집 덕을 톡톡히 보았다. 다행히도 아이들을 너무 예뻐하시는 원장님과 선생님들 덕분에 아이들을 마음 편하게 맡겨놓을 수 있었다. 오죽하면 셋째를 낳았을 때 이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어린이집 갈 때까지만 버텨보자가 우리의 모토였다. 나의 어린이집에 대한 신뢰는, 한때나마 어린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의 과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살을 맞대고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엄마 품을 떨어지기 싫어하던 우리 아이들도 각각 2년씩 어린이집에서 안전하고 즐겁게 생활하고 졸업했다. 첫째, 둘째를 보내던 어린이집에 또다시 막내를 보내기 위해 얼마 전 어린이집을 다시 찾았을 때에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미리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이후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를 겪으면서, 나는 선생님들께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로 이어지면서 아이들이 이들 보육 또는 교육기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상당하다. 그 이후에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아이들은 어쩌면 엄마보다 더 많은 시간을 선생님들과 보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막대하다. 아이들이 부모 다음으로 자주 보는 어른들로써 아이들이 경험하는 세상을 확장시켜 주기 때문이다. 선생님들 역시 감사하게도 나와 함께 우리 아이들을 키워주고 계신 셈이다. 


뿐만 아니라 오며 가며 아이들이 만나는 친구들과 친구 부모님들 또한 나의 육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아이들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일상이 오고 가고, 방과 후나 주말에는 서로 아이들과 함께 만나 어울리면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준비물이 생각나지 않을 때, 버스 시간표를 잊어버렸을 때, 아이를 학원까지 데려다줄 사람이 필요할 때 친구 부모님들의 도움으로 나는 여러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워킹맘으로서 절대 혼자가 아닌 이유는 바로 아이가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워킹맘으로 키운 우리 아이들은 넉넉하지 않은 엄마와의 시간을 기대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엄마가 없는 시간들을 꿋꿋이 견뎌낸다. 우리 첫째가 유치원 시절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른 아이들은 유치원 버스를 타거나, 내릴 때 엄마가 나오는데 자신의 엄마는 안 나와서 서운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아이가 엄마가 많이 그립구나 생각해서 마음이 아팠었는데, 얼마 전, 엄마가 만약에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일을 그만두면, 본인이 다양한 학원을 다닐 수 없고, 그러면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없게 돼서 안된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너무나도 논리 정연한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혼자 일하면서 바둥바둥 아이를 키운 것 같지만, 워킹맘의 아이는 엄마의 빈자리를 일찍부터 참아내면서 스스로를 키워나가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나는 부모님들, 선생님들, 아이 친구들과 친구 부모님들, 아이 자신에 이르기까지 '함께' 아이들을 키워나가고 있기 때문에 육아에 대한 내 공도 없다. 아이가 똑똑하면 선생님 덕분이고, 인성이 좋으면 어려서부터 잘 돌봐주신 부모님과 이모님 덕분이며, 모자람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것 또한 다 주변 지인들 덕분으로 마냥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굳이 여기서 남편 이야기를 적지 않는 것은, 남편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와 함께 육아를 해야 하는 당사자이자 본인 스스로가 워킹대디이고, 주변분들의 도움을 감사한 마음으로 같이 받아왔을 뿐이다. 물론 남편은 그 역할을 지난 10년간 꿋꿋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잘 수행해주고 있지만, '보살' 또는 '유니콘'으로 불리는 그의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함께 키우는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당사자가 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는다. 가끔 나는 나의 일상을 늘어날 만큼 늘어난 피자 반죽에 비유하곤 하는데, 일이든 육아든 찢어지기 일보 직전까지는 스스로 열심히 해야 한다. 즉 나와 남편은 육아의 1차 책임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다가 구멍이 나는 순간,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맞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도움을 받은 이상, 이를 마음의 빚처럼 여기고 직장에서의 일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맞다. 


다 적어놓고 보니 내 일상이 좀 숨이 막히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또 그러하면 어떠한가. 아이들이 클수록 육아의 총량은 적어지니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되고, 그 와중에도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최애를 만난 아이돌 팬처럼 헤벌쭉 웃게 되니, 이 또한 나의 팔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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