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닥다닥. 톡톡톡 양파 됐고, 다음 버섯 토닥토닥. 팔이 묵직하다. 노란. 빨간 파프리카 이제 네 놈을 사정없이 다져 주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숨겨둔 복병 당근 차례다. 놈은 딱딱해서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끝장을 봐야지. 우주의 기운을 모아 두닥 두닥 두닥. 대파 송송 마지막 청양고추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드디어 끝이다.
도대체 뭘 하길래 이리 요란 뻑적지근하냐고. 오래간만에 두부 스테이크를 만들 참이다.
냉장고에서 ‘날 언제 내보낼 줄 거냐’고 난리 부르스를 추는 650g의 손두부 한모를 처치하려면 꽤 많은 야채가 필요하다. 다진 소고기는 이미 맛술에 취하게 하고 마늘, 후추, 간장으로 정신 못 차리도록 혼을 쏙 빼두었다. 손두부 너 이 녀석. 반항 따윈 용서치 않겠어. 양손에 움켜쥐고 단숨에 버스라뜨린다. 아까 내 말에 반항하던 누구와 달리 두부는 비명 한번 내 지르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하여 야채들의 품속으로 흩어졌다.
뽀얀 분대신 약간의 부침가루를 넣고 재료들이 서로 내 취향 아니라고 밀어내지 않도록 사랑의 접착제 계란까지 보태면 완벽한 하모니가 이루어진다. 이제 열정적으로 치대기만 하면 된다. 그 많은 야채를 다지며 끓어오르던 분노를 아껴 두었다가 이제 드디어 쏟아낼 때가 왔다. 벅벅. 요즘 부쩍 잔소리가 늘어나는 중년 남자의 볼살을 쥐고 흔들 듯 맹렬히 주무른다.
야채 전, 동그랑땡, 볶음밥 재료, 그리고 오늘처럼 두부스테이크를 만들려면 이것저것 다양한 채소들을 다져야 한다. 처음엔 기꺼운 마음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팔이 아파오고 재료들은 사방으로 아우성치며 탈출을 시도하면 첫 마음은 온 데 간데없다. ‘어휴 사서 고생이지’하고 입이 댓 발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누가 시키기라도 했으면 대판 싸울 기세로 도마를 내리치고 있다.
그날도 한참 주방에서 아름다운 뱃살을 위한 먹거리용 야채를 다지고 있었다.
“어서 와서 이것 좀 봐.”
거실에서 중년 남자가 불렀다.
‘나 바쁜 거 안 보여. 네가 와라. 주방으로’란 말을 꿀떡 삼키고 손에 묻은 물을 앞치마에 대충 훔치고 거실로 갔다. 주말이면 떠나보낸 첫사랑 그리듯 애틋한 눈빛으로 TV를 바라보던 중년남자다. 근데 웬 홈쇼핑. 리모컨을 마치 게임기처럼 빠르게 터치하던 그가 순간 이동. 아, 아니 화면 이동 중 우연히 포착한 그것은 바로 다지기. 그가 손짓하는 화면엔 주황색 몸통에 귀염둥이 곰돌이가 음흉하게 웃으며 유혹하고 있었다.
쇼호스트 [showhost]는 또 다른 진행자와 함께 마치 마법처럼 자유자재로 곰돌이를 다루고 있었다. 세트로 판매되는 각종 용품은 다지기뿐만 아니라 채썰기, 호박이나 오이 둥글게 썰기. 재료 섞기도 가능한 신박함. 그 자체였다.
“저거 사자. 당신 팔도 안 아프고 다양하게 쓰임새가 좋네.”
도마에 칼 꽂히는 소리가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자기를 대신에 곰돌이 놈을 안길 기특한 생각이라도 하다니.
곰돌이와 한 식구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애용하는 쇼핑몰에 청귤이 떴다. 올겨울 청귤 차 어때. 여름이면 청귤 에이드 좋잖아. 3kg와 5kg 중 고민하다 호기롭게 5kg에 검지를 꾹 눌렀다.
며칠 후 도착한 청귤은 내 입이 떠억 벌어지게 했다. 무게는 생각지 않고 감자 3kg의 부피만 생각한 내 머리를 탓하지 누구를 원망하랴. 길치, 박치, 음치, 몸치, 기계치.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수치까지.
‘또 사서 고생이군’을 뇌까리며 베이킹소다와 식초로 깨끗이 닦아 물기를 제거한 청귤을 얇게 썰 준비를 한다. 엄청난 양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양도 만만치 않지만 크기가 작고 동글동글하니 한 손에 잡고 썰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열 개쯤 했으려나. 칼질하는 내 모습이 어설프게 보였는지 옆에 와서 알짱대던 남자가 '유레카'라고 외치며 곰돌이 채칼을 꺼내 온다. 말릴 새도 없이 의기양양해하며 식탁 한쪽에서 전을 펼치고 한 개를 집어 들어 손을 갖다 댄 순간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그 일이 일어났다. 독립투사로 혈서 쓸 일도 없건만 단지가 웬 말인가.
곰돌이 채칼의 위력은 대단했다. 중년남자가 하도 꽉 싸매고 있어 베인 정도를 볼 수는 없었지만 피가 멈추지 않는 정도로 봐선 보통은 아니다 싶어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토요일 오후니 응급실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는 통증과 무안함, 미안함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이깟 걸로 병원은 무슨”이라며 한사코 마다한다. 응급처리를 끝낸 후 식탁과 바닥에 흘린 피를 닦았다. 식탁 위에서 여전히 웃고 있는 곰돌이 놈을 끌어내려 싱크대에 처박아 버렸다. 도와주겠다고 시작한 중년남자의 섣부름은 내 일거리만 잔뜩 늘리고 걱정만 끼친 채 시간은 한참을 지나 있었다.
다음날까지 상처에서는 피가 멎지 않았다. 병원을 가자고 했지만 내일까지 기다려 보자란 말만 하고 여전히 똥고집을 부리는 그를 아들 같았으면 고함을 내지르고 한 대 쥐어박은 후 병원으로 끌고 갔을 텐데.
월요일 오전. 드디어 병원에 갔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고 피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혹시 몰라 파상풍 주사까지 맞고 부분 깁스를 했다. 우리는 그 와중에 마주 보고 빵 터졌다. 엄지 손가락을 베였을 뿐인데 깁스라니. 일주일을 그의 시중을 들고 머리를 감기면서 피비린내를 안겨준 곰돌이가 나는 무섭고 두려웠다. 그렇다고 새것인데 버릴 수도 없다. 그 후로 이년이 지났지만 곰돌이는 여전히 서랍장 안에 상전처럼 고이 모셔두고 있다.
그날의 기억을 떠 올리는 사이 두부 스테이크가 구워졌다. 부침가루를 거의 넣지 않아 모양이 예쁘게 나오지는 않았다. 고기와 두부가 잘 어우러져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니 약간 빈대떡 같은 맛이다. 이정도면 다른 이에게 주어도 부끄럽지 않겠다. 애시당초 나눠먹을 요량으로 많이 했으니 세등분으로 적당히 나눔을 한다.
음식은 정성이 반이라더니 역시 곰돌이 보단 내 손맛인가. 이번에도 곰돌이 도움 없이 해냈다. 아직도 곰돌이 울렁증이 있는 걸 보니 당분간 곰돌이는 푹 쉬게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