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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pr 23. 2020

PhD-TSD: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 - e03.

스스로 닫아버린 가능성. 그리고 끌려가는 대학원

그는, 학부 시절 동안 나름대로 좋아하던 컴퓨터 공학과의 수업들을 찾아 듣고 수학과의 수업들도 찾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결국 남은 것은 '탁월성을 갖춘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초라해진 평점'과 스스로에게 탁월성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닫아버린 가능성'입니다. 어쩌면, 그냥 남들 많이 듣던 학점 잘 주고 적당히 쉬운 과목들을 선택해서 들었다면 그의 자존감은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는 그러지 못했을 뿐이죠.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냥 닫았다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는 스스로 "나는 안될 거야"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를 사랑했고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네, 그는 끝까지, "나에게는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특별함이 있어"라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주먹을 펴야 새로운 것을 이 손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주먹을 끝내 펴지 못한 것이죠. 


그렇게 애매한 상태로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미 졸업학점은 모두 수강했고 초과 학기를 다니며 결정을 유예하고 있었죠. 그 기간에는 아쉬움이 남았던 동아리 활동도 하고 밀린 재수강도 했고 좋아하던 남은 과목들도 청강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졸업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죠. 이 시점에서 그는, 그 끝에 와서야 고민에 빠집니다. 결정을 내려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는 프로그래밍을 좋아했지만, 그의 실력이 컴공과 학생들 대비 충분한 탁월성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으며, 동시에 이 당시에는 프로그래밍은 물론 프로그래머에 대하 전망이 좋지 못했죠. 지금과 같이 스타트업 분위기가 있어서 소위 '힙'한 것도 아니었고, 암울한 잿빛에 가까운 무엇이었죠. 회사에 가게 된다면 사내 IT팀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선배들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그다지 대우가 좋다고 느껴지지 않았죠. 


그리고, 결국 그는 프로그래머를 '도구'로 바라보던 당시의 보편적인 시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네, 학부 내내 동기들은 늘 "프로그래밍을 왜 배우냐, 우리는 나중에 걔네를 경영하는 위치에 갈 것인데"라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고 굳이 어려운 과목을 들으러 다니던 그를 비웃었죠. 그 또한, "아니 그렇지 않아, 그렇게 게으르게 공부하는 너네가 망할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그들의 의견에 굴복하게 된 것이죠. 다시 말하지만, 그는 그들의 의견을 반박할 만큼 탁월성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니까요.


고민을 하던 끝에, 그는 결국 대학원에 지망하기로 결정합니다. 뜬금없을 수 있지만, 그는 막연할지언정 공부를 멈추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찾는다는 핑계로 군대를 가는 타이밍도 놓쳐버렸고, 대학원을 가면 '전문 연구요원'으로 병역을 대체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죠. 이 시점에, 그냥 군대를 현역으로 가게 되면 그의 삶은 거기서 멈출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실제로 그랬을 것 같습니다. 박사를 졸업한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바라보아도, 그때 대학원을 가지 않았다면 그는 공부와는 매우 먼 거리에서 살아가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정말로 "공부에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때 그는 그걸 알지 못했죠. 당시의 그는 대학원을 간 것이 탁월한 선택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는, 아니 꽤 많이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죠. 그가 원하던 삶은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대학원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죠.


결국 그는 그가 학부 때 연구 참여를 했던 연구실, 그가 애정이 남아 있던 연구실에 지망을 하는 것으로, 선택을 내렸습니다. 이 연구실은 그나마 그가 관심을 가진, '프로그래밍'과 '알고리즘'과 관련 있는 연구실이기도 했고, 그의 성적표의 유일한 A+ 또한, 이 연구실의 교수님 수업에서 획득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실을 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는 군대를 가겠다"라는 각오를 가지고 있기도 했죠.


그리고, 대학원 면접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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