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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May 24. 2020

PhD-TSD: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 - e12

지도 교수의 유형 2편: 게으르게 잘하는 교수.

대학원에서 만날 수 있는 지도 교수의 유형을 '열심히'와 '잘'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총 4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당연히, 지도 교수는 "연구실 운영 방식", "연구 지도 방식", "지도 교수의 인성" 등의 매우 세부적인 기준들을 사용하여 분류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만, 저는 "열심히"와 "잘"이라는 두 가지 기준만으로도 매우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열심히"와 "잘"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열심히"는 "야망 있는"이라는 말과 유사할 것 같아요. "성공하려는 욕구가 넘치는 경우"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아요. 보통 막 학교에 부임한 젊은 교수님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며, 동시에, 이 분류에 속한 분들은 "성공을 위해 대학원생을 믹서기에 갈아 넣을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해석해도 어느 정도 타당합니다. 젊고 열심히 하지만, 인성마저 좋은 교수님들도 있습니다만, 여러분이 대학원에 입학해서 만나게 될 지도 교수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반대로, "열심히 하지 않는"의 경우 정년 보장(Tenure)을 이미 받은 노교수님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이죠. 이미 꽤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니까 미련이 없는 분들이 많은 거죠. 물론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만. 


두 번째로, "잘"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연구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느냐"를 의미합니다. 

현재의 연구 흐름을 읽고 기존 연구의 한계점을 분석하여, 연구실 혹은 대학원생의 연구가 나아가야 하는 향후 연구 방향을 설정하는 것, 그리고 대학원생의 질문 들에 대해서, 얼마나 좋은 지도 코멘트를 해줄 수 있는가? 와 같은 것들이 지도 교수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성질의 것이죠. 당연하지만, 이 부분이 부족하면 연구실의 방향은 물론 대학원생의 졸업에도 큰 위기들이 닥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랬고요. 

젊은 교수님들의 경우 대부분 이 부분이 갖춰져 있고, 나이 든 교수님들의 경우도 어떤 통찰력을 갖추고 계신 분들이 있어서 중요한 순간에 머리를 댕-하고 때리는 코멘트를 주시기도 하죠.


두 번째 유형: 열심히 하지 않지만, 잘하는 교수.


보통, 젊은 시절에 눈부신 실적들을 쌓았고 이미 정년보장을 받은 나이 든 교수 중에서 이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이미 정년은 보장되어 있고, 또한 이미 쌓아놓은 명성으로 인해서 특별히 더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프로젝트들이 알아서 들어오는 상황이고, 연구실도 관리를 잘하여 교수가 굳이 세부적으로 터치하지 않아도 이제 알아서 고년차 대학원생들이 알아서 잘 운영하는 정도가 되어 교수는 상대적으로 할 일이 적어집니다. 


또한 본인이 젊은 교수 시절에 희망하던 것들, 가령 '정년보장', '연구단장', '학과장'과 같은 것들을 대부분 달성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큰 야망은 없는 상황이죠. 따라서 상대적으로 온화하여 대학원생들에게도 따뜻하게 혹은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경우들이 많습니다(전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야망이 펄펄 살아 숨 쉬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속하는 교수들은 연구센터의 장이나, 연구단장을 맡고 있는 경우들도 있어서, 대학원생 개개인에게 충분한 시간을 내어주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점에서 교수는 이제 더 이상 본인의 역할이 직접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도'를 하는 역할에 가깝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과거의 연구에 비해 좀 더 macro 한 관점에서 방향을 지시하거나, 조언을 하는 정도만으로 본인의 역할을 한정하죠. 이를 다르게 말하면, 대학원생 개개인에 관한 지도 교수의 관심이나, 지도가 적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개-좋은 것이죠. 천국입니다 천국 예이. 지나가는 아무 대학원생을 붙잡고 물어봐도 99%는 지도 교수의 관심이 적은 것을 훨씬 선호할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심히는 하지 않지만 잘한다'라는 것이죠. 지도 교수가 이제 연구의 macro 한 방향만 설정한다고 해도, 이때 이 macro 한 방향 자체가 잘못된다면 대학원생의 졸업과 미래는 매우 불투명해집니다. 여기에 속하는 지도 교수는 여전히 연구에 대한 통찰력이 살아 있고,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해당 연구의 흐름과 중요성을 빠르게 파악합니다. 그리고 금방 이해하고 툭 코멘트를 하나 던지는데, 그 코멘트가 또 기가 막혀요. 어떤 대학원생은 "교수가 너무 바빠서 내 연구에 관심이 전혀 없어"라고 불평을 하다가도 같이 밥 먹으러 가는 길에서의 짧은 설명 만으로 지도 교수가 다 이해하고 크리티컬 한 코멘트를 딱 던지고 대학원생은 머리가 댕- 하고 울리는 기분을 느끼고는 다시 지도 교수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오릅니다.



당연히, 이러한 연구실들이 학부생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습니다. 지도 교수는 유명하고, 따라서 괜찮은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하는 것에도 큰 무리가 없고, 교수가 나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으므로 교수가 주는 스트레스는 적고, 동시에 교수가 현재 야망이 크지 않으므로 실적에서 오는 압박도 크지 않으니, 은근히 워라밸을 맞춰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꽤나 이상적인 대학원 생활이 될 수 있어요.


다만, 여기서는 교수와의 관계가 아닌 대학원 선배들과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흔히 말하는 '사수'가 성격이 개차반이라거나, 자신의 논문에 대한 성과를 뺏으려 한다거나, 하는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죠. 어찌 보면 교수는 대학원생들에 대해서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까, "사자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인 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 다만, 그 선배도 언젠가는 졸업을 하고 떠나게 되므로 괜찮습니다. 교수가 나쁜 사람인 것보다는 대학원 선배가 나쁜 게 그나마 낫죠. 다만, 그 선배가 이 연구실에서 포닥을 한다거나 하면 피곤해지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렇게 인간적으로 좋은 교수님이 계신 연구실은 대학원생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수는 '공공의 적'이고 함께 공유하는 '공공의 적'이 존재해야 대학원생들끼리 긴밀해지는데, 그게 없으니까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하죠. 뭐 다 그렇지는 않지만, "온화한 교수님네 연구실은 맨날 대학원생들끼리 싸우고, 독사 같은 교수님네 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들끼리 단결한다"는 팩트입니다. 


다만 이러한 연구실에서는 오히려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끓는 물의 개구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친구의 경우 이러한 연구실에서 별 스트레스 없이 지내며, 추가로 '학원강사'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며 살더군요. 그러다가 결국은 학위 자체를 중간에 그만두었습니다. 그저 희소한 하나의 케이스일 수 있습니다만, 어떤 긴장도 없이 적당한 상황은 오히려 발전 자체를 저해할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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