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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pr 24. 2020

PhD-TSD: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 - e05

막연한 몇 가지 희망들을 가지고, 2지망 연구실에 입학하다. 

대학원 면접을 본 뒤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학과 사무실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됩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지망하신 1지망 연구실은 교수님께서 아무도 뽑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2지망 연구실은 붙었습니다. 만약 진학할 마음이 있으시다면, A교수님과 연락을 해보시고, 입학을 하실 것인지 유무를 확정해서 알려주세요". 정도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분이 째-진다는 아니었지만, 그때 그가 느낀 감정은 '기쁨'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비록 1지망은 아니었을지라도, 대학원에 붙었다는 것은 "그가 그의 생각만큼 아주 면접을 망친 것은 아니었구나"를 알려주는 증거였으니까요. 대학원 면접을 조금은 슬프게 기억할 법했는데, 이제 덜 슬프게 기억할 수 있으니 일단은 좀 행복한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아직 조금은 쓸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죠. 반대로, 만약 그가 떨어졌다면 그의 손에 남아 있는 선택지는 '군 입대'뿐입니다. "갈 수 있는 데 가지 않는 것"과 "갈 수 없어서 가지 못하는 것"이 결과는 같지만 그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글쎄요. 물론 떨어졌어도 어떤 평행세계에서의 그는 잘 지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 같아요. 큰 좌절감에 빠졌을 것만 같아요. 


그리고, 1지망 교수님께서 아무도 뽑지 않았다는 것도 그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좀 찌질할지라도, 이것은 "나는 가고 싶었는데, 그 교수님께서 아무도 안 뽑았지 뭐야~"라는 명예로운 죽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일종의 정신 승리인 셈인데, 힘들 때는 그래도 '정신 승리'메커니즘이 필요하니까요. 


기쁨은 순간이고, 이제 그는 조금은 평온한 상태에서, 결정을 내려합니다. 이제 다시 선택권은 그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까요. 대학원에 합격하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지망한 연구실은 아니었으니까요. 교수 A의 연구실에서 어떤 연구를 하는지 그는 대학원 면접 전에는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구 내용과 별개로 교수 A는 성격이 매우 괄괄했고 툭하면 학생들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요. 여기에 추가로, 그가 가르치는 수업의 강의 평가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수 A는 제가 대학원 면접을 볼 때 면접위원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어떤가요? 연구도 별로, 교수도 별로, 교수가 했던 수업의 질도 별로인데 그래도 이 연구실을 가야 하는 걸까요? 


네, 그는 결국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학부 때 충분히 하지 못한 공부를 더 이어나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하나, "여길 가지 않으면 군대를 가야 한다"라는 마음도 하나, "그냥 학부를 졸업하기에는 나의 학벌이 아깝다"라는 것도 하나였죠. 결국, 아주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지만, 교수 A의 연구실에 입학을 하기로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죠. 그리고 마음을 내렸으니 이제 그 필요성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실낱같던 희망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희망1) 그래도 교수 A가 가르치는 수업은 IT시스템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실에서 연구를 진행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것들을 이어서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2) 이미 입학한 연구실 선배들 중에서 자대생들(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간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이들도 그 동기들 사이에서 중상위권은 되던 사람들인데, 여길 진학을 한 것을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교수가 괜찮은 사람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연구 분야도 괜찮은 게 아닐까?, 즉, 이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면 이 연구실에 왔을 리가 없잖아?

희망3) 나만 입학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같이 면접을 본 (적당히 친한) 후배 또한 같은 연구실에 입학한다. 혼자 입학한다면 힘들겠지만 같이 입학하는 것이니까, 좀 편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네, 그는 부끄럽게도 이 연구실에서 뭘 연구하는 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상황에서 꽤 막연한 희망들로 그의 선택의 당위성을 채워 넣고, 대학원에 진학하게 됩니다. 만약 '가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먹었어도 그 결정을 지지할 수 있는 많은 근거들이 존재했으니까요. 진지하지 못한 태도였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지금 돌이켜보면 옳은 선택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이때 대학원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는 다시 학업의 길로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공부에는 정말로 때가 있거든요. 어떤 시기를 지나버리면 다시 공부를 재개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니까요. 


물론, 기억 또한 믿음의 문제이며. 어쩌면, 어떤 평행세계에서는 대학원을 가지 않고 군대를 다녀온 그가 있을 것이고, 그는 어떤 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런 게 중요한가요? 그는 지금의 그가 그 순간에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습니다. 그 이후의 과정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살아남았으니까 하는 말일지 몰라도, 그때의 부족한 그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안타깝지만 그 3가지 희망이 모두 헛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죠. 하지만, 그때는 또 그때의 새로운 이유가 생기는 법이죠. 아뿔싸,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끝끝내 그 실낱같은 희망을 만들어가며 버텼습니다. 가끔은 정말 그만두고 싶었지만 대학원 생활이라는 것은 초장에 그만두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니까요. 


글을 쓰면서 돌이켜 보니 어떻게 버텼나 싶은 순간들도 있습니다만, 이제 다 지나 왔으니 할 수 있는 이야기죠. 대학원에 들어가고 나서 생겼던 아주 스펙터클한 일들이 많지만, 그 이야기들은 조금 쉬었다가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그 사이사이에는 외전 격으로, 제가 학부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들도 같이 섞어서 정리해보려고 해요. 


덧 1. 그리고 이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대학원 면접 중 인성 면접 때 대학원 주임 교수님께서 그의 어느 정도 당돌한 모습과 영어 실력을 보고 꽤 좋게 봤고, 교수 A에게 "이 학생 괜찮은데, 뽑는 게 어때?"와 같은 식으로 추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사하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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