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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pr 10. 2020

PhD-TSD: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 - e00.

Episode 00: 박사가 되었습니다만.

십수 년 전, 매우 막연하게 공대생이 되고 싶어 하던 한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수능에서는 무참하게 실패하고, 재수 끝에 꿈에 그리던 학교의, 꿈에 그리던 공대에 입학했지만, 입학한 후 새로운 삶에서 대학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내가 다 씹어먹었는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냥 술 먹는 게 좋았고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이 더 즐거웠던 것뿐이죠.


시간이 지나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자, 그는 이제 선택을 했어야 했습니다. 대학교 성적이 뛰어나게 좋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분야의 성적은 괜찮았습니다. 그는 프로그래밍을 좋아했었거든요. 하지만, 그 당시, 2010년대 초반에는 그 분야를 공부한다는 것이 지금처럼 유망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소위 '개발자'라는 것은 당시에 약간은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가 있었죠.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분야가 머지않아 '학문과 산업의 대세'로 자리 잡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학생만 몰랐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는 그 길목에서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라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거든요. 그리고 학교 특성상 많은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이 대학원을 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치의학전문대학원/법학전문대학원을 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선택을 존중하지는 않았어요. 웃기는 소리죠. 정작 공부는 그런 아이들보다 못했으면서.


그저, 꽤 꽁기 꽁기한 흥선대원군 같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대생이 어떻게 그런 데를 갈 수가 있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의대'를 포기하고 '공대'를 왔는데, 다시 '의대'를 간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라는 생각이 기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는 명문대 의대를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지방대 의대를 갈 수 있었던 것뿐이었죠. 만약, 그가 '서울권 주요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더라도, 과연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었을까요? 글쎄요. 모를 일이죠. 그럴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두 가지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대학원을 가거나, 군대를 가거나. 늘 '군대를 갈 거야'라고 말하고, 정작 입영신청은 하는 방법도 모르던 그는 어느새 학과에서 본인이 그나마 제일 잘하고 좋아하던 분야의 연구실 홈페이지를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실에서 연구 참여를 하기도 했죠. 머지않아 그는 본인이 이전에 했던 말을 번복하며, '이 연구실을 못 가게 되면 군대를 갈 거야'라고 말을 합니다. 왜였을까요, 그는 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군대가 무서웠던 것일까요. 둘다였을까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연구실은 그 해에 어떤 학생도 뽑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학생이 충분히 괜찮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뽑았겠죠. 다만, 대학원에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연구실에서 이 학생을 뽑았거든요. 그리고, 그는 다시 생각에 빠집니다. 심지어 학부 때 좋아하던 교수님도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싫어하는 교수에 가까웠죠. 강의 질이 매우 안 좋기로 유명했거든요. 이 시점에서 그는 이미 뱉어 놓은 말이 있고, 군대를 가야 하는 것이 맞지만, 다시, 정신승리를 시전 합니다. 그래요, 군대가 무서웠던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 지금 군대를 가게 되어, 학업의 길을 놓치게 되면 다시는 이 길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직감했던 것이죠(물론, '군대' 자체가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결국 그는 대학원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천국은 없습니다(물론, 가끔은 도망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만). 그가 박사의 무게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지 정확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조금은 먼 일입니다.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며, '군대가 무서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이유였던 그는 대학원에 오게 되었고, 도착한 곳에서 그는 사막 한가운데에 혼자 몸으로 던져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좋았지만 배울 것이 없었던 선배님들과, 사람마저 좋지 못했던 지도 교수와, 알파고 전후로 급격하게 변해버린 연구의 트렌드 사이에서, 그는 '아, 철저하게 혼자 살아남아야만 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아 X 됐다"라는 말을 풀어쓴 것뿐입니다. 그리고, 말로 다 하기 어려운 그 긴 고난의 길을 겨우 끝내고, 결국 꿈에 그리던 박사가 되었습니다.


동화나, 강연 같은 곳이라면 '고생 끝에 박사가 된 그는 회사에 입사하고 결혼해서 잘 살았다고 한다'와 같은 결말이 나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여러분도 아는 것처럼 그렇지 않잖아요. 그가 마주한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끝낸 이후 며칠 정도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아무 걱정 없이 술을 마시면서 행복하게 보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지금의 삶이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걸까?"라는, 매우 본질적이고 피곤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죠. 


어떤 극단적인 상황 속에 내던져진 사람은 상황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상황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택하고 발달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약화시키고 제거해야 하는 것들도 있죠. 그리고, 한 인간의 가치관과 방향마저도 달라지곤 합니다. 


네, 그는 문득 지난 대학원에서의 삶들이 그를 완전히 바꾸어버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은 실제로도 매우 타당한 이야기였죠. 그는 '졸업'하기 위해서 선택하고 길러내야 하는 것들이 있었고, 참아내야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능력은 커지고, 혹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텨낸, 문득 매우 커져버린 가치관 같은 것들도 생겨났죠. 


그가 지금 가진 허무함과 불안함 들을 떨쳐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난 삶의 순간들을 회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과연 네가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네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니?"라고요. 그것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지금의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작은 선택들이 쌓이고 그로 인해 기억들은 매우 혼재되어 존재하니까요. 그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일지라도, 이것을 하지 않으면 그는 지금의 그를 온전히 버텨내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제가 이곳에 글을 쓰고 있는 이유죠. 

이름은 PhD-TSD, PhD-Traumatic Stress DIsorder,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대학원을 졸업하기 까지, 무수하게 존재하던 고통과 고민과 잘못된 선택의 나날들. 그리고 그 순간을 뒷받침하는 많은 기간들을 모두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또한, 아주 솔직하게 작성하기 위해서 오프라인에서의 저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들을 최대한 배제하려 합니다.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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