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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Jun 01. 2020

PhD-TSD: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 - e14

Your manuscript has been accepted.

그는 아직도 가끔 어떤 날, 그의 메일함에 들어와 있던 하나의 문장, "Your manuscript has been accepted"라는 문장을 기억한다. 그냥 길을 걷다가도, 그 메일을 생각하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고, 혹은 힘든 날에는 그 메일을 메일함에서 검색함에서 찾아 읽기도 한다. 웃기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대학원생들은, 아마도 첫 번째 Accept 메일을 받았던 날을 각자의 다른 기억들일지언정 꽤 선명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연구가 유행을 따르지 않는 우직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연구 세상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꽤나 유행에 민감하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학계를 강하게 덮치고 나면 기존의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되던 것들은 모두 재편된다. 가령, 알파고 이후 기존의 많은 방법론들은 꽤나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고(정확히는 논문에 게재되는 것이 어려워졌고), 데이터 기반의 방법론들이 비교적 쉽게 저널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이제 막 올라타게 된 대학원생에게는 빛이 내려오는 것이고, 낡은 패러다임에 머물고 있는, 졸업을 앞둔 대학원생에게는 어쩌면, 구렁텅이로 빠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또한, 당신의 연구가 어떤 쪽이 될지는 몰라도, 대학원생이 절망을 느끼는 이유는 단지, '연구 패러다임의 변화'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대학원생에게 각자의 연구 주제는 '지도 교수의 방향 설정'에 달려 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교수가 하려고 하는 연구를 대학원생이 대신한다"가 대부분의 대학원 연구실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그 지점에서 대부분의 대학원생은 교수가 가지고 있는 연구의 패러다임과 현시대의 패러다임, 그리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연구의 패러다임의 충돌들 속에서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물론, 대부분의 교수의 연구 패러다임에 의해서 복종하게 되는 경향을 띄게 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로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을지는 모른다. 다만, 무엇인가 선택을 했다는 것, 그리고 만약 결과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나가지 못할 경우 이 선택의 순간을 곱씹게 된다는 것에서 어떤 비극은 시작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당신이 저널에 제출하는 논문들은 Accept보다는 Accept이 아닌 다른 것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인생은 '잘되는 것'보다는 '잘 되지 않는 쪽'이 훨씬 많은 법이니까. 운이 좋다면, Minor Revision, 적당히 Major Revision, 아니면, Reject라는 결과를 받게 된다.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았다면, 당신의 실력이 모자라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 당신은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다. 그럼 과거의 일들을 굳이 곱씹으며, "그때 그 방향 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 지점. 모든 대학원생이 한 번은 만나는 그 지점에서 모든 대학원생들은 스스로를 비난하고 스스로의 실력을 폄하하고,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재미있는 것은 결국은 그 숱한 생채기와 자기혐오들 끝에, 대학원생은 한 번 "Your manuscript has been accepted"이라는 메일을 받고 나면, 매우 쉽게 자기 긍정으로 돌아선다. 역시, "내가 될 줄 알았어!"라는 식으로 너스레를 떨게 된다. 그 또한, "과연 내가 졸업을 하기는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로 넘쳐나던 어떤 시기에 그리고 "박사를 포기해야 하나"라고 고민하던 시기에, 논문은 매우 갑작스럽게 게재가 확정되었고, "Accepted"라는 단어를 본 그는, 이전의 우울했던 감정들은 모두 사라진 채로 걸어가면서도 실실 웃으며 다녔다. 그런 것이다. 지나가는 어떤 대학원생을 붙잡고 물어봐도 "Accept"이라는 단어만큼 대학원생을 행복하게 하는 단어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저 "Accept"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을, 우리는 그 감정만으로 스스로를 너무 비난한다. 그러지 말자. 당신은 노력했고, 그것이 부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비난하고 상처 줄만큼 잘못한 것이 아니다. 


알고 있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그 또한 그 어려움과 황폐한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유별나게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편이 되어 주었어야만 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연구도 논문도 풀리지 않는 거지 같은 시절이 올 것이다. 어차피, 그 시절은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당신 또한 "Accepted"라는 메일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무 비난하지 말고 무사히 넘기도록 하자.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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