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nknown Apr 14. 2020

PhD-TSD:
박사 후 스트레스 장애 - e02.

산업공학과, 그리고 스스로 닫아버린 가능성. 

사실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분야의 연구실에, 좋은 성품과 좋은 능력을 갖춘 지도교수 밑에서 연구를 한다고 하여도, 대학원 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아하지도 않는 분야의 연구실에 입학하여, 그렇지 않은 지도 교수 밑에서 연구실 생활을 마치 '버텨내겠다'는 자세로 유지했으니, 그의 대학원 생활이 쉽지 않음은 이미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기는 했죠.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인이 좋은 상사 밑에서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확률"이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0에 수렴하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그가 왜 그 힘든 길을 굳이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 되짚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그의 대학교 생활과 그가 속한 학과의 특성을 다시 되짚어볼 필요성이 있죠.


그는 흔히 '산업공학'이라고 부르는 분야에서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 학문 혹은 분야에 대해서 "이 분야는 도대체 뭘 연구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죠. 이를 비교적 간단하고 짧게 정리하자면, "산업 현장에서 혹은 경영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매우 다양한) 문제들을 공학적인 접근으로 해결하는 학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그 정의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산업공학은 컴퓨터공학과 수학 그리고 경영학의 기본적인 백그라운드를 토대로 하며, 세부적으로는 정보 시스템/최적화/인간공학/품질 공학/금융 공학/데이터 분석 등 매-우 다양한 학문들과 뒤섞여 있습니다. 제가 이 학과에서 박사까지 졸업을 했지만, 냉정히 말하면 좀 잡과의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공대의 다른 학과들도 대학원 레벨로 가면 각자 매우 세부적인 연구를 하게 되고, 바로 옆에 있는 연구실이라도 본인의 연구와 매우 차이가 큰 경우들이 있기는 하지만, 글쎄요, 제 주관적인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산업공학과는 그 정도가 좀 더 심한 느낌이 있죠. 물론 변호를 하자면, 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문제는 그 범위가 매우 넓고 그 문제로부터 각 학문이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제가 대학교에 입학했던 2000년대 중반에는 아직 이공계 기피 현상이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문득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지금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었으니까요. 많은 학생들 또한 'pure 공대'보다는 문과에 가까운 학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공대에서 '산업공학과'로 전과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경영대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졸업한 뒤에는 경영 컨설턴트가 되는 것을 지망하는 학생들도 매우 많았고요. 


그리고, 이 분위기에 맞춰서, '경영공학과'라거나, '산업경영공학과'라는 이름들로 '경영-지향적인 느낌'의 학과명으로 변경하는 대학교들도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포지셔닝이죠. "우리 학과는 전통적인 공대는 아니야~경영학에 가까워~"라는 포지셔닝. 그리고 이는 꽤나 효과적이었고 그 속에서 당시 산업공학과는 꽤나 인기 있던 학과였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그 선택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그 시점 이후 새로운 시대를 맞아들이는 상황에서 타이밍을 놓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조금은 남아있죠.


다만, 여기서 그는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또한 어느 정도는 그 분위기에 맞춰서 산업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입학하고 보니, 와서 배우는 것들이 너무나도 '비공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단지 학과의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커리큘럼도 바뀌고, 초빙되는 교수의 전공 분야도 달라지고, 따라서 학과 내에서 개설되는 과목들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기술경영'이라거나, '전략경영'과 같은, 그의 기준에서는 '경영학에서 열려야 하는 과목들'이 개설 과목에 꽤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몇 과목들을 들어보기도 했지만, 그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공학'과는 괴리가 있다고 느꼈죠. 물론, 누군가에게는 그 방향이 본인에게 잘 맞았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그는 이 커리큘럼이 형편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학과의 다른 동기들은 그와는 조금 달랐죠. 그가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한 그 과목들은 다른 학생들에게는 모두 매력적이었는지, 폐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꽤 많은 학생들이 수강하기도 했죠. 네, 당시 학내 분위기는 '경영-지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혼자 외롭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는 그 분위기에 염증을 느꼈고, 그가 좋아하던 '프로그래밍'과 '알고리즘' 수업들을 찾아 듣기 시작합니다. 종종 컴퓨터공학과에서 수업을 수강했고, 수학과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죠. 다만, 슬프게도 그는 거의 매번 컴퓨터공학과에서 털리고 돌아왔습니다. 어떤 과목은 첫 번째 수강에서 D+을 두 번째 수강에서 C+을 그리고 세 번째 수강에서야 B+를 맞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음 글쎄요 그보다는 경쟁하는 학생들이 유별나게 잘했던 것뿐이죠. 


그가 경쟁했던 학생들은 국내에서 그 분야에서 최고로 잘하는 학생들이었죠. 그가 프로그래밍을 잘했다고 해도, 그것은 2군에서 잘했다는 것이지, 1군과 경쟁에서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2군에 든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한 탁월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지만, 그는 그 고생 끝에, 스스로 본인의 가능성을 닫아 버립니다. "저렇게 잘하는 애들이 많은데, 내 실력으로는 이걸 하면 안 돼"라고 말했죠. 굳이 듣지 말라는 다른 학과의 수업을 들어가며, 좋아하는 것을 나름대로 열심히 찾았던 그에게 남은 것은 컴공과에게 털리면서 '낮아져 버린 평점'과 '스스로 닫아버린 가능성'이었죠. 

작가의 이전글 오늘은, 강제 종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