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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Apr 20. 2022

기형도의 「가을 무덤 - 祭亡妹歌」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31)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영하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뒤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치며 하구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을 앓는 중풍병자로 태어나

전신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 기형도, 「가을 무덤 - 祭亡妹歌」 전문(『기형도 전집』, 2004)


  김지하가 보기에 기형도는 삭임의 시김새에서 우러나오는 수리성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 그에게는 현실 세계의 무수한 고통이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기형도는 제 안의 고통을 삭이지를 못했다. 마치 장바닥에 내장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고통만 즐비하게 늘어놨다.


  기형도의 ‘죽음의 문학’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뱉어내기는 했지만, 그것을 삭이고 삭여 한으로 응축하지 못했고, 나아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신명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기형도에게는 그늘의 주름만 있고, 흰 그늘의 펼침이 없었다.


  그러나 향가「제망매가(祭亡妹歌)」의 세계는 누이의 죽음을 한스럽게 바라보면서도 끝내 미타찰에서 만날 것임을 확신하는 가운데 오롯이 ‘그늘’이 생성되어 있다. 또한 태어남 자체를 고통으로 바라보고, 그러한 근원적인 슬픔을 통해 세상 만물과 소통하는 자세가 드러나 있다. 그것이 그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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