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분수도 모르고 살았다
연잎을 배우고 계영배를 실천하는 법
탄탈로스라고 하는 제우스의 아들이 있었다.
소아시아의 폭군이자 꼴통이었다.
신들을 초청하여 속임수로 인육을 먹게 했는데
그 벌로 기갈지옥에 가게 된다.
기갈지옥이란 방에 갇혀 몸이 꽁꽁 묶인 채로
물 한 잔 마시지 못하며
온종일 굶주림을 겪어야 하는 곳이다.
물이 점점 차오르다 입까지 와
마실 수 있겠다 싶으면 물이 빠져 버리고,
머리 위에는 나무열매가 탐스럽게 있으나
손을 뻗으면 나뭇가지가 위로 올라가
평생 기갈을 겪는 지옥이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못 먹고 굶는 고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뭐 하나 먹지도 못하는데 지옥맛은 제대로겠다.
이 탄탈로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듯
탄탈로스의 접시라는 화학기구가 있다.
이 기구는 차면 기우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차면 기우는 원리’를
분(分)을 지키는 상징으로 여겼는데
그 상징물로 계영배라는 것이 있었다.
계영배란 술이 일정한 한도에 차오르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이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의 계영배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고
분(分)을 지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법정스님이 남기신 글에서
계영배를 실천하는 듯한 연잎을 볼 수 있었다.
연잎의 지혜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
어느 만 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이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구나 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세상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 가지다.
-법정-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연잎의 지혜를 배워 계영배를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난 이걸 잘 못 이해하고 살았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 많이 남았는데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내가 가진 그리고 가질 능력에 맞지 않게 살아
분(分)을 지키지 못했다.
제 분수도 모르고
한참 못 미칠 쯤에서 이내 만족해 버렸다.
더 좋은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면
내가 그 정도는 되는구나 하며
제의가 온 것에만 만족했고,
나를 좋아하는 여자가 금수저면
내게 과분하다며 지레 밀어냈다.
스스로 세상을 기갈지옥으로 만들었다.
눈앞에 적당히 익은 열매에 만족하고
머리 위 잘 익은 열매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차기도 전에 스스로 기울여 더 취하지 않았다.
바라는 마음도 담을 그릇도 크지만
막상 주어지려 할 땐 분수도 모르고
더 가지는 것을 주저했다.
가질 수 있는데 가지지 않았으면서
굶주림을 호소했다.
분수란 제 신분에 맞는 한도인데,
한도 미달로서 내 분수를 지키지 못했다.
상자에 갇힌 벼룩처럼
상자 안에서의 내 최대치에 만족했다.
상자 안은 내 분수에 맞지 않았는데.
연잎의 지혜는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받아들이는 거다.
계영배의 실천은
넘치려고 할 때 경계하는 것이다.
분수에 맞게
가질 수 있을 만큼 가지고
누릴 수 있을 만큼 누려도 되는데
분수에 맞지 않게
가질 수 있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했다.
넘치려면 한 참 모자랄 때부터 경계했다.
그동안 잘 살지 못한다 느꼈던 건
분수에 맞지 않게 살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