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따코 Feb 07. 2024

당신이 추락하는 사이
<추락의 해부> 리뷰 / 스포일러

추락한다

는 언어에는 은근한 죄악감이 숨어있다. 우린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의 추락을 지켜봤을까. 사는 동안 몇 번의 추락을 경험해 볼 수 있을까. 혹은 이미 경험했을까. 

한 여자가 있다. 남편이 실패한 것에 성공한 아내, 시각장애인 아들의 어머니,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아 글을 쓰는 소설가. 한 인간이 그렇듯, 주인공 산드라는 여러 가지 역할 수행을 해야 하는 인간이다. 


영화는 소설가 산드라로 시작한다. 그녀는 한 학생에게 인터뷰를 당한다. 그리고 그 인터뷰는 남편의 방해로 중단된다. 소설가 산드라의 역할 수행은 그렇게 손쉽게 초반부터 중단된다. 


그 이후로 남편이 죽는다. 추락사이자 의문사다. 고지대의 흰 눈밭 위에 붉은 혈흔이 퍼진다. 똑같은 푸른 니트를 나눠 입은 부부는 그 순간 한 명은 피해자, 한 명은 가해자로 또 다른 임의의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남편 사뮈엘의 사망 시각 당시 아들 다니엘은 반려견 스눕과 함께 산책을 나간 중이었고, 산드라는 남편과 함께 집에 있었다. 산드라가 살해 용의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산드라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소설가였다는 것. 재판이 열리고 세간의 관심이 쏠린다. 마녀사냥을 하듯,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 교수의 자살보다는 앙심을 품은 여류 소설가의 살인’이 훨씬 흥미롭기 때문이다. 사건이 언론을 타고, 산드라는 악마화되고, 다니엘까지 증인이 되어 재판장에 서게 된다. 

산드라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러나 불어에 능숙하지 못해 영어를 주언어로 사용한다. 산드라는 평소에 늘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당신은 절대 피해자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산드라는 남편이 원하는 글쓰기를 못하는 이유는 그저 스스로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들이 시각을 잃게 된 결정적 원인에 대한 책임을 남편에게 묻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잠시간 원망을 했을 뿐 자신은 아들을 장애아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그저 평범한 아이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고에 대한 원망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남편이 자신의 불행을 아들에게 투시한다는 점을 미워했다고, 그렇게 고백한다. 서툰 영어와 불어를 오가며 산드라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변호한다. 아들에게 상처를 줘가면서까지. 

끊임없는 말들이 이어진다. 모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하는 말들이거나 자신을 변호하고자 하는 말들이다.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말을 하는 유일한 인물은 산드라의 아들 ‘다니엘’ 뿐이다. 극에 등장한 모든 인물들은 한 번씩 궁지에 몰린다. 그럼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말하기와 침묵하기를 선택한다. 어떤 것을 내뱉고 어떤 것을 삼킬지를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겁을 먹은 인간의 유약함일 뿐이니 안쓰럽게 바라볼 수 있다. 냉혈한으로 보이는 검사마저도 자신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올 때는 얼굴을 붉히고 말이 빨라지며 평정심을 잃는다. (나도 어절 수 없는 인간이라 영화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할 때 나는 영화에 마음을 뺏겨버리고 만다) 

어머니가 살인자일까, 아버지의 자살일까. 의 문제에 대한 중요한 키를 쥐게 된 다니엘은 자신의 조력자에게 묻는다. 어떤 것에도 확신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믿음을 지어내야 하는 것이냐고. 다니엘의 조력자는 말한다. 결정을 해야 한다고. 믿음을 지어내는 것과 결정을 하는 것은 아주 다른 얘기라고.  


말은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말은 무언가를 믿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물이 수많은 대사를 빠른 템포로 쏟아낸다. 그러나 누구도 그 무언가를 증명해내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게임에서 서로 언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에게도 보상은 없다. 궁극의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결국 남편의 사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산드라가 범인인지 제3자의 개입인지, 변호사는 산드라를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 초반엔 방청객으로 가득 차던 재판장도 후반부에선 텅텅 빈다. 관심은 사그라들고 사실과 진실은 분간되기 어려워지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만이 뒤섞인다.  


관객조차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해 버리는 것. 우린 여기서 이 영화가 이미 끝났다고, 결말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언뜻 착각해버리게 하는 것. 1년이 넘는 시간을 타임워프 한 극의 시간 속에서조차도 피로를 느껴 포기해 버리는 것. 그것은 우리의 무지를 자극한다. 당신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무지의 시작이라고. 

그래서 재판이 끝난 후 산드라가 아들에게 하는 외침은 공허하다.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어. 아빠는 나의 소울메이트였어. 하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다니엘은 그런 엄마를 품에 안고 키스한다. 아이는 아직 아이이기에 그러할 수 있다. 


추락사의 원인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추락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을 관전하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재판장의 배심원들은 검사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흥미로운 증거가 나오면 만면에 미소를 띠기도 한다. 피고인이나 증인이 받는 고통은 상관없다. 그저 누군가가 타락하는, 추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울’ 뿐이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의 불행을 쉽게 여길 수 있는 이유. 그 이유는 사실 우리 모두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부터 불행하기 때문이다. 나만 죽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다. 근거 없는 비약일 수 있겠지만, 최근의 세태를 보면 무리한 생각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당신이 추락하는 사이, 당신은 어떤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말을 외치고 있는가. 우린 그 짧은 찰나를 인생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너를 사하는 분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