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한 달 살기
2020년 마드리드에서 새해를 보내고, 1월 5일 일요일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에 도착했다. 때마침 오늘 저녁에 ‘동방박사 오신 날’ 퍼레이드를 하니 사탕 주워올 비닐봉투를 챙겨 나갔다 오라며 리셉셔니스트 Ana가 등을 떠민다.
‘동방박사 오신 날(Dia de reyes magos)’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고 경배 드린 것을 경축하는 날로 스페인 전 지역에서 길거리 퍼레이드를 벌이고(사탕을 잔뜩 뿌린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때문에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는 명절이다.
말라가 시내 초면 길을 사람들이 향하는 대로 휩쓸려 가다 보니, 퍼레이드 길을 사이에 두고 긴 의자행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구역이 나눠져 있고 구역과 밖에서 앉아서 서서 기다리는 어른들도 아이들도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고, 설레여 한다는 것을 외지인인 내가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음악소리에 북 소리에 퍼레이드가 시작됨을 알렸고, 오픈 마차를 탄 사람들이 왕자 왕비 코스튬을 한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가며 뭔가를 연신 뿌려대었다. 그들이 뿌려대는 사탕을 공중에서 받는 사람, 땅에 떨어진 사탕을 주워대는 사람, 허리 굽혀 떨어진 사탕의 흔적을 찾아대는 사람 등등.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저마다 챙겨 온 비닐봉투가 두둑하다. 옆 사람들이 나에게도 몇 개 나눠주었고, 나도 땅바닥의 사탕을 몇 개 주워 가득 챙겨 돌아왔다.
그렇게 말라가에서의 나의 첫 날은 생경함 속에서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며 기분 좋게 시작되었다.
말라가의 겨울은 햇살이 뜨겁고 하늘이 맑아 춥지 않다. 일부러 남쪽 지방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겨울이면 뼈 마디마디 관절들이 기름칠을 안 한 듯 부대끼고, 특히 어깨와 목은 왜 이리 시린지 따뜻한 곳을 찾는다.
남쪽이라는 믿음에 가벼운 옷만 챙겨간 나의 잘못이랄까, 첫날 밤부터 오들오들 추위에 떨어야 했다. 방에 있는 라디에터는 내 방을 커버하기엔 한 없이 작았고, 밤새 양말 정도 말릴 수 있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추위에 떨며 왜 이 곳을 선택했을까 후회하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한인 네트워크’ 방을 두드렸다. 유학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며 쓰던 물건을 처분한다는 게시글이 많이 올라와 있었고, 다행히도 괜찮은 가격에 그리고 여기서 사용하다 두고 갈 수 있는 전기매트를 하나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월 셋째 주엔가 드디어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수업 중에 콜록이고, 때로는 나오려는 기침을 참으며 끙끙 대었다. 몸이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마른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벽에 걸려져 있는 지도 속에서 ‘우한’을 가리켰다.
갑자기 웬 우한? 그 옆에 있는 코레아는 어디 있는지 한참을 찾던 그녀가 우한을 당당히 가리키는 모습이 너무 놀라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때까지도 우한이 왜 거기서 나와? 도대체 우한은 어떤 곳이야? 뭐가 유명한 곳일까? 했다는 것이다.
12월 말에 한국을 떠나 스페인에서 지내면서 뉴스를 보고 한국과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선생님은 작정이나 한 듯이 ‘감기약은 먹었니? 독감주사는 맞았니?’ 하며 걱정을 드러내셨다. 이부프로펜이 들어있는 약을 먹어야 한다, 약국에 있으니까 사먹어라, 너희들은 어떤 감기약을 먹니 하며 한참을 나를 상대로 ‘너 감기 걸린 거야? 얘들아, 우리도 조심해야겠다?’ 하는 거 같았다.
한국 코로나19 환자가 2020년 1월 20일 처음 발생했다. 첫 번째 확진자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들어온 중국인 여성이다. 2020년 1월에 WHO(세계보건기구)는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해서 많이 듣고 비교됐던 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만들어냈다는 스페인 독감’이다. 당시 세계 인구가 약 17억 명이었는데, 약 5억 명 이상을 감염시켰고, 5천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막스 베버 등도 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스페인독감은 1918년 미국 캔자스의 하스켈 카운티(Haskell County, Kansas)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에도 스페인 독감으로 불리는 것은 당시 세계전쟁 중에 중립을 선언했던 스페인만이 보도 금지 없이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울휴가로 택한 한 달의 어학연수 기간 동안 말라가의 추위와 감기, 엄청난 양의 공부(?)와 스트레스로 지친 나는 비행기 변경 추가요금을 내면서까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2020년 2월, 마드리드 공항에서부터 인천공항까지 이상한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나라의 약국 어디에서나 파는 마스크를 마드리드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 후에야 1개에 5유로나 되는 마스크를 겨우 2개 살 수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릴 정도로 크고 입 부분이 툭 튀어나오고 머리 뒤에서 끈으로 조절하는 마스크였다. 생긴 것도 이상하고 사용하기도 용이하지 않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특히 인천공항에서, 이런 마스크를 낀 동양인이, 가끔 중국인 같다는 소릴 듣는 내가 기침까지 한다?
기침을 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이 마스크를 고쳐 매거나 옆으로 조금씩 자리를 피했다.
그들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빨리 집에 가고 싶었던 적이 내 인생 통틀어 없다.
집에 돌아오고서야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체감할 수 있었고, '자가격리' 모드 속에서 2020년 한 달의 휴가를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