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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 스페인어 어학연수

스페인에서 한 달 살기

by 딸리아

스페인 어학연수 시스템은 주 단위로 이루어진다. 만약 내게 6개월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처음 한 달은 매주 서로 다른 학원을 돌아다니며 나에게 가장 적합한 곳을 택할 테다.


내가 찾아간 Malaca Instituto는 매주 한 레벨씩 오르며 한 권의 교과서를 띤다. 매주 월요일 8시 30분 신입생들의 레벨테스트가 있고, 매주 금요일 10시 30분 재학생들의 레벨테스트가 있다. 신입생들은 A1-C2의 레벨로 나뉘고, 재학생들은 상위 레벨로 가는데 무리가 있는지 체크하기 위해 시험을 본다.


4주를 보낸 나의 연수 일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04:30, 눈이 절로 떠진다. 약간의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아이스크림, 젤리처럼 높은 열량의 음식을 맘 편히 먹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한국과 잠깐의 소통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며 오늘 학습할 내용을 찬찬히 훑는다.

06:30, 세수하고 옷 입고 학교 갈 준비를 한다. 기숙사 생활이라 매일 청소해주는 하우스 키퍼가 있어 치울 것도 없다. 하지만 내가 무얼 입고 무얼 먹고 어떤 화장품을 쓰고 언제 생리를 하고 어제는 무얼 샀는지 너무도 들여다보이는 게 싫다. 조금이라도 덜 드러내고 싶다.

07:30, 책가방을 메고 카페테리아로 향한다. 옆 건물로 옮겨가 내려가도 되지만 일부러 건물 밖으로 나가 찬 공기를 쏘인다. 트레이에 크로와상과 햄, 샐러드 등을 올리고 카운터로 가 café solo(블랙커피)와 zumo de naranja(오렌지주스)를 주문하며 Rafael과 인사(스페인어)를 나눈다. 하나 둘씩 몰려드는 친구들과 아침인사(영어)를 나누며 아침식사(Desayuno)를 한다.

수업 들어가기 전, 근처 초등학교 주변을 산책한다. 이른 아침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등교하는 아이들과 잠깐 떠나 보내는 게 아쉬운 부모님들, 그들의 반복된 일상적 이별과 여기 저기 세워둔 차량들로 복잡하고 활기찬 사랑스러운 아침이다. 잠깐 아이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08:30, 담임선생님이 숙제를 체크하고, 새로운 문법을 가르치고, 배운 문법을 적용시킨 연습문제를 풀며 오전 수업을 받는다. 1주 차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못 알아들었지만 눈치껏 책을 넘기고 앞 사람이 하는 거 따라 하기도 자신있게 나서서 하기도 하며 열심히 수업을 받는다.

독일,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 몰타, 일본, 한국 등 각기 서로 다른 나라에서 모여든 여덟 명이다. 연령은 고등학교 갓 졸업한 19세 독일 여자부터 몰타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73세 교장선생님까지 다양하다. 한국과 달리 대학 다니는 친구들은 없다. 주로 점원/판매원이나 보조교사로 일하며 여기 오려고 몇 달 동안 돈을 모았다는 당당한 젊은이들이다.

11:30, 아점시간(Almuerzo)으로 당분을 보충한다. 스페인에서는 하루 다섯 끼를 먹는다고 하지. Almuerzo는 다섯 끼 중 두 번째로 과일이나 소소한 과자를 먹으며 머리를 식힌다. 강의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담소를 나눈다.

11:50, 회화선생님의 스타일에 따라 게임으로 또는 일대일 대화로 수업이 이어진다. 12시 30분, 정규수업은 끝이 난다. 엑스트라 수업료를 낸 사람들끼리 모여 일주일에 2번 수업을 받는다. 몇 명 되지 않아 여러 반 학생들이 모이고 한 주제를 놓고 각 나라 상황, 정보를 나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엔 바로 방으로 들어와 숙제를 하며 복습을 한다. 대략 2-3시쯤 쇼핑을 하든, 관광을 하든 시내로 나간다.

14:30, 모든 수업이 끝난 후, 점심(Comida)을 먹기 위해 아침에 갔던 카페테리아로 내려간다. 하루 한 잔, 와인 또는 맥주로 입가심을 한 후 고기와 야채 듬뿍 든든히 배를 채운다. 아침에 봤거나 혹은 새롭게 입학한 친구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소화도 할 겸 주변 동네를 거닌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곳곳에 수영장을 갖춘 대저택들이 즐비하다. 집집마다 붙여진 이름들이 독특하다. 언덕에서 해안을 바라보며 앉아 있기도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기도 한다. 타국에서의 아름다운 광경으로 떠나온 이 순간을 행복해한다.

16:00, 방으로 돌아와 숙제와 복습을 한다. 대략 2-3시간 공부하고 가져 온 책들을 읽으면 어둑어둑해진다. 저녁이다.

19:30, 매주 들어오는 신입생들 덕분에 일주일에 한두번 타파스를 먹으러, 댄스를 배우러, 학교 액티비티로 시내엘 나갔다. 그게 아니면 저녁식사(Merienda)로 과일과 과자를 간단히 먹고 운동을 나간다. 적응이 되고 취향을 알게 되면서 저녁시간에 100분 정도, 왕복 6-7KM 되는 해변 주위를 걷기도 뛰기도 하며 즐기게 되었다. 말라가 해변, 길게 뻗은 도로에서 그루를 만들어 운동을 하기도 하고, 가족 또는 연인과 또는 혼자서 저마다 운동하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부자 동네 사람들이 더 날씬하고 건강하다 하지 않던가, 그런 그들의 여유를 부러워 하며 나도 그 중의 하나가 된다.

밀가루, 고기, 맥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해외생활이 제격이다. 대신 살 붙을 각오는 확실히 하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살이 찌면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번 휴가엔 여기 있는 동안 먹은 만큼 찌운 만큼 운동해서 빼기로 했다. 아무래도 규칙적으로 살 수 있어 정해진 시간에 운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21:00, 운동하고 돌아오는 그 시간이면 저녁식사(cena)를 하러 나가는 몰타 친구, 프란세스코를 만난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는 그의 제안을 사양한다. 지금 시간에 식사라니요, 아니 되옵니다.

방으로 올라가기 전 컨시어지 서비스를 담당하는 Ana와 잠깐의 수다를 떨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Malaca Instituto는 말라가 언덕 위에 있는 학원으로 기숙사와 아파트, 바를 겸용하는 카페테리아, 요리강습실, Gym,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다. 가까이에 말라가 해변이 있고, 일 년 내내 작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2000 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이곳에서 스페인어를 배운다.


서울에서 떠나면서 1주 마드리드, 4주 말라가, 1주 포르투갈 여행을 하리라 계획했다. 현지인들과 같이 동일한 시간대에 생활하고자 어학연수를 택하고 그들이 일하는 시간에 나는 공부를 하리라 마음 먹었다.

마드리드를 여행하고 말라가로 넘어가 4주를 보내면서 포르투갈 계획이 사라졌다.

숙제를 하고 문법을 배우고 회화를 하며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 편치 않다. 나이는 들었지만 공부하는 학생이라 금요일마다 보는 시험에서 점수가 공개되고 등반을 못할 수도 있다는 중압감이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Isabel은 금요일 시험에서 Fail을 받았다고 한참을 울었다. 69세 어르신이 시험을 못봤다고 레벨업 못한다고 우시다니,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가뜩이나 외워지지도 않는 동사 인칭 변화, 영어의 be 동사라도 상태와 존재에 따라 서로 다른 동사가 존재한다, 과거형도 습관이냐 단순과거냐에 따라 어미가 달라지고, 몇몇 동사는 이것마저도 지켜지지 않는 불규칙동사라는 등 규칙이 없는 듯 규칙이 있는. 그러니까 문법일텐데 아휴 진절머리가 났다.


휴가랍시고 와서는 되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내가 뭥미? 하면서도, 오래간만에 맛보는 쫄깃쫄깃한 긴장감에 신선하기도 재밌기도 하고, 때로는 자책을 하며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확실히 외우겠다 맘을 먹기도 하고.

낮에 미술관이나 영화관, 쇼핑을 나가게 되면 새벽 1-2시가 되어 잠이 들었다. 숙제를 안 할 수는 없고, 복습을 하지 않거나 다음날 배울 내용을 훑어보지 않으면 그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이렇게 보낸 말라가에서의 어학연수가 버거웠던 걸까. 4주가 지날 즈음 포르투갈이고 어디고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여행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또 다른 과제로 여겨져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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