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한 달 살기
A2반 수강생 7명은...
집안에서 자기 혼자만 스페인어를 못한다며 유학 온 스위스 여인 멜리사(20), 400여 평의 집에서 살고 있고 현재 영어 어학원을 운영한다는 몰타에서 온 할아버지 프란세스코(73세), 서로 사귄 지 5년 되었다는 네덜란드에서 온 이사벨(69)과 피터(73), 초중등학교 보조교사로 일한다는 스웨덴 여인 에리카(26), 나름 실력있다는 이탈리아음식 쉐프 일본인 슈시(50), 언젠가부터 겨울이면 따뜻한 나라를 찾는 한국 여인 유진(50) 등 평균 연령 51세 학생들이 말라가에 모였다.
초보자 코스인 A2라 하더라도 유럽인들의 실력은 나 같이 ‘ABCD(아베체데)’ 수준이 아니다. 대부분 학교 때 스페인어를 배웠다거나 지리적 위치상 쪼금/가끔 써 본 경험이 있다고나 할까. 특히 유럽권 학생들은 스페인어로 대화가 가능한 듯. 단지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그래서 제대로 배울 겸 즐길 겸 모였다고나 할까.
서로 다른 나라에서 모인 이들은 스페인어 아니라도 대화가 가능하다.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사람들은 통상 독일어를 사용한다. 덴마크, 스웨덴 사람들이 모이면 스웨덴어를 사용했다. 일본인 슈시나 한국인 내가 이들과 함께 하면 우린 영어를 사용했다.
특히 국경지역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국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요즘엔 학교에서 제2외국어, 제3외국어를 선택으로 배우고 있다고 한다. 같은 땅덩어리에 내 나라, 네 나라 선만 그어져 있어 넘나드는 것이 쉬워서인지, 아니면 20-30일 휴가일수가 많아서인지 1월인데도 많은 이들이 모였다.
일본이 우리의 이웃이듯(?), 유럽인들은 주변에 많은 나라와 가까이 있다. 마치 지방자치인재개발원과 같이 한국의 연수원에 모인 서울,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 사람들과 같다.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 간에 문화적 이질감은 있지만 ‘한국인’이라는 공통성이 있듯이 그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모였지만 유럽공동체(EU)라는 하나의 공통성으로 비슷하게 비춰졌다.
그런 면에서 슈시와 나는 좀 통하는 데가 있었다. 우선 나이도 같고 일본과 한국이라 시간적 지리적 정서가 있어서인지, 산업화와 경쟁사회를 지냈고 살고, (유럽인들은 놀라지만) 이제는 우리도 52시간제라며 자랑스러워 했고, 자국에서 살아온 만큼 앞으로의 남은 생은 타국에서 지내고 싶다는 마음도,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개인적 요구도 서로 공감하고 있었다. 슈시는 그런 면에서 실천을 하고 있다. 앞으로 스페인에서의 어학연수가 끝나면 멕시코로 넘어 가서 쉐프로 일할 꺼란다.
프란세스코는 연세에 비해 굉장히 혈기왕성한 분이다. 외국인이라 제 나이보다 들어 보이긴 하지만 많아야 60세 정도로 봤는데 73세라니.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라니. 워낙 공부하는 것을 즐기시니까 휴가 차 이곳에 오셨을(?)텐데, 언제 은퇴할 거냐는 질문에 죽을 때까지 일할 거라는 그의 답변에 난 잠시 숙연해졌다. 한국은 파이어족이니, 은퇴 후 실버타운이니 전원생활이니 하며 너나 할 것 없이 ‘쉼’에 대해 얘기하는데, 작은 섬 나라 몰타에서 온 그는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스위스 여인 멜리사는 나의 금 귀걸이에 관심이 많았다. 금이라 비쌀 거라며 자기는 절대 살 수 없다며, 너무 심하게 부러움을 표현하는 바람에 급기야 ‘내 꺼 빼서 줄까’ 할 뻔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이 거의 알고 지낼 정도로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말라가에 오기 위해서 몇 달을 저금했다. 멜리사는 스위스어, 독일어, 영어는 하는데 스페인어를 못한다며, 아빠와 오빠는 스페인어로 대화를 한다며, 자기도 스페인어로 그들과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스웨덴 여인 에리카는 항상 수업에 늦게 나타난다. 아침밥을 못 먹었다며 툴툴거리는 그녀는 쉬는 시간이면 스웨덴에 있는 남자친구와 영상통화를 하고, 책상에 엎드려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수업시간엔 졸기도 하고 실수도 하며 우리에게 잠시 빙구미, 웃음을 주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아침 수업시간의 그녀는 세수는 했나 싶을 정도로 아무거나 껴입고 온 듯 수수하고 말도 별로 없는데, 저녁이면 특히 시내에 나가는 날 밤이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고 말도 많고 하이 텐션이다. 그런 그녀의 신체 중 변함없는 곳이 있다면 화려하게 네일아트를 한 손톱이다. (가끔 손톱 장식이 떨어졌다며 교실 바닥을 더듬는다.)
첫 주 금요일, 레벨테스트 후 자가 채점을 했다. 점수를 체크하시던 선생님이 이사벨에게 내주부터 여기가 아닌 다른 강의실로 옮기라고 하였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면서 갑자기 이사벨이 울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든 어느 연령이든 성적과 성과는 민감하다. 그렇긴 한데…
69세 네덜란드인 이사벨이 울고 있다. 오 마이 갓. 분위기에 압도되어 고개 숙였다가 친구들 보며 ‘이게 뭐지’ 했다가 이사벨의 어깨를 두들겼다가 세상엔 참 별일이 많네 하며 시간이 흘렀다. 한참 후 선생님과 이사벨이 강의실을 나가자, 그때서야 그녀의 남자친구 피터가 자주 겪는 일인 양 웃으면서 괜찮다고 우리를 다독였다.
이사벨은 얼마 전까지 커다란 배를 탔다고 한다. 40여 년을 화물선 선장으로 여러 나라를 오갔고, 길게는 한 달 넘게 바다 위에서 살았단다. 그런 그녀가 시험을 못 봤다고 운다. 전날 한 숨도 못 자고 공부를 했다며 속상해했다. 누가 봐도 이꼴 저꼴 별꼴을 다 보며 살았을 텐데, 그렇게 69년을 살아 온 어르신이 누구도 없는 다른 나라에서 그것도 외국어학원에서 시험 못 봤다고 울었다.
이사벨이 등반을 못하자 혼자 남게 된 피터는 부쩍 말수가 줄었다. 자신의 대머리를 긁적이며 가끔 농담도 하며 웃겼던 피터인데 책만 보며 공부만 한다. 네덜란드에서 안경사로 일하다가 이사벨을 만났고, 주말을 함께 보내며 연인으로 지낸 지 5년 됐다는 그들. 순수하다 느껴지리만큼 꽁냥꽁냥 거리는 그들의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쉬는 시간이 되자, 우리 반 문을 열고 그의 연인, 이사벨이 나타났다. 그때서야 피터는 웃었고, 곁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며 그제서야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2020년 1월, 말라가의 어느 스페인어 어학원 A2반에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강생들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