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구미 행진

행복 대탈출

by 아빠 민구

고개를 돌리면 그곳엔 바구미가 벽을 오르고 있다. 방금 전에 내 옆에 있는 벽에서 바구미를 두어 마리 잡았는데, 몇 분만에 또 다른 바구미가 벽을 오른다. 거실에도, 화장실에도, 베란다에도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오르는 바구미들이 창궐했다. 원인은 알지 못했다. 분명 우리 집 쌀독은 밀폐된 유리 용기로 되어있어서 바구미가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바구미의 행렬은 점점 짙어졌다. 발본색원이 필요했다.


신혼 때 산 작은 냉장고로 여섯 식구의 식재료를 감당하긴 어려웠다. 냉장고 옆에 작은 랙을 설치해 각종 식부자재를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아내는 창고 같아질 것 같다고 싫어했지만, 막상 설치하고 보니 그 효용은 대단했다. 통조림과 견과류, 건어물과 영양제까지 렉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제일 아랫칸에는 쌀과 고구마, 감자, 잡곡류가 무게중심을 잡았다.


설마 거기 병아리콩 자루에서 바구미가 뿜어져 나올 줄을 상상도 못 했다. 나름 고무줄로 잘 동여놨고, 바구미가 콩을 먹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병아리콩으로 요리를 하려 꺼낸 어느 날, 아내는 수천의 도둑들과 마주했다. 콩자루째로 물에 담그니 흡사 살수대첩이 펼쳐졌다. 하지만 전장에서 살아남아 병아리콩 속 안에 자리를 잡은 도적떼는 끊임없이 자유를 찾아 탈출을 시도했다.


아내는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다. 바구미를 잡아내고 콩자루를 살려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낭비가 몸에 사람이다. 병아리콩에 투입할 시간과 노력의 자원이 오히려 낭비라고 주장했다. 말싸움으로 이길 순 없었지만 아내가 잠든 사이, 나는 야간작전을 펼쳤다. 콩자루를 그대로 들고나가 음식물쓰레기통에 부어버렸다. 두 달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바구미들의 본거지가 처리된 후, 바구미들의 개체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유를 향해 발버둥 치던 바구미들은 대부분 생포되어 어항에 던져져 고단백 간식이 되었다. 일부는 쇼생크 못지않은 실력으로 문지방을 넘고 창틀을 넘어 생각지도 못한 어느 곳엔 가 닿았다. 갈길이 막힌 베란다 한 구석에서는, 테이프에 달라붙은 수백의 바구미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바구미는 왜 행복한 콩자루를 나온 것일까. 자신이 먹을 음식에 둘러싸여, 적당한 짝을 찾아 후손을 늘리면 되는 행복한 콩자루 속에서의 삶은 매우, 매우 매력적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쌀자루 콩자루 속에서 태어난 바구미로 살아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해방의 바구미는 행복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바구미는 행진했다. 바닥을 가로지르고 벽을 기어오르며 어디엔가 닿으려 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삶은 고귀한 것이었다. 안주하지 않고 몸을 내던진 삶. 무언가를 추구하고 노력하여 달성한 소수의 바구미들과, 그 과정에서 도태된 개체들 모두가 진일보를 위한 가치 있는 한 걸음이었다.


나는 콩자루 속 바구미인가, 과정에서 도태된 바구미인가, 그곳에 도달한 바구미인가. 깨톨만한 바구미를 보며 나를 돌아보는 하루다. 보잘것없는 민구, 바구미, 관찰, 고찰.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부끄러운 삼겹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