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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 플렉스

나의 낭비를 지탄하지 마소서

by 아빠 민구


하루에 6명이 사용하는 수건은 에코모드를 적용했을 때 10장 정도이다.

아이들 네 명이 줄지어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젖은 수건 4개가 생기고, 그 수건들은 '젖음'의 정도가 많지 않기 때문에 통상 재활용이 된다. 하지만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사용하는 수건 같은 경우에는 재사용이 어렵다. 더울 땐 하루에 두세 번도 샤워를 하기도 하고, 6명이 수십 번씩 손을 씻고 나서 사용하는 수건들도 있다. 그래서 뭐 이런저런 경우를 다 커버할 수 있는 우리 집의 적정 에코모드 수건 사용량은 일평균 10장 정도이다.


한편 나는 출장을 좋아한다. 물론 새로운 지역에 가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는 것도 좋고,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출장의 준비와 오고 가는 운전, 돌아와서의 행정적 처리는 물론 수고스럽지만 출장은 대체로 즐겁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유쾌한 일은 매번 마른 수건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조금 괜찮은 숙소에 묵게 되면 몸과 머리와 발을 닦는 수건이 구분되어 있고, 수건으로 된 가운을 입을 수도 있다는 점은 정말 좋다.


집에서는 에코모드에 따라, 아이들이 사용한 축축한 수건을 항상 내가 재활용하곤 하므로 보송보송함은 경험하기 어렵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에코모드를 적용하지 않으면) 하루에 수건은 20개씩도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건이 아니더라도 우리 집의 세탁기와 건조기는 하루평균 보통 3~4회씩 돌아간다. (4년 정도 사용한 세탁건조기의 본전은 이미 회수되었다고 내부평가하고 있다.) 아무튼 수건의 경우는 머금을 수 있는 수분의 양이 많아서 건조기를 돌리면 다른 옷에 비해 전력 소모가 더 많다. 그러니 수건을 아껴야 한다.


다시 출장으로 돌아와서,

피곤에 절어 들어온 숙소에는 항상 보송하고 쿠션감 살아있는 수건들이 좌우로 정렬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 저녁에 그렇게 각 부위를 나눠서 수건을 사용하더라도 다음날 아침에 또 새로운 수건을 꺼내 사용할 수 있는 예비군이 남아있다는 점은 출장을 한결 뽀송하게 만들어준다. 매 출장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아주 유쾌한 경험이다. 그래서 나는 수건이 자유로운 출장을 좋아한다.


간혹,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처갓집에 가는 경우가 있다.

어차피 퇴근해서 벗어놓을 옷들도 세탁기는 돌려야 하고, 그 세탁기에는 수건이 1장이든 3장이든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나는 결심한다.


"수건 플렉스"


가장 두툼하고 보송한 수건을 골라잡아 샤워를 한다. 그렇게 사용한 수건은 당장에 세탁바구니에 던져버린다. 그렇게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건 없다. 아직 수십 장의 수건이 수건바구니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이들이 쓰고 던져놓은 축축한 수건은 쓰고 싶어도 없다. 나의 앞엔 마른 수건들만이 남아있다. 수건 플렉스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늘어가면서 가장 누릴 수 없는 소소한 행복이 수건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출장이나 간혹 혼자 남겨진 집에서 사용하는 마른 수건은 참 좋다. 한 번쓰고 던져버릴 수 있는 기분 좋은 낭비 수건 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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