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노란색 머리칼을 가진 언니(1)
노란 머리칼을 가진 언니, 그러니까 베스와 처음 만난 곳은 다름 아닌 온라인이었다. 정확히는 '외국인 친구 만드는 어플'에서 서로를 처음 알게 되었다.
12년 동안 영어를 공부했는데도 난 왜 영어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걸까?
이게 내가 그 어플을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였다. 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했고, 그러려면 영어공부도 해놓아야 했다. 이게 참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같은 문제였다.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호주에 가려는 건데, 호주에 가서 일을 구하려면 영어로 말할 수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하기는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4년 전 나는 호주에 가기 위해서 처음으로 외국인들과 랜덤 채팅 어플을 쓰기 시작했고,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외국어를 놓고 싶지 않았기에 그 어플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그 대신 그 어플에서 괜찮은 사람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랜덤채팅'은 그 이름 그대로 불특정 다수와 이야기할 수 있는 어플이었기에, 내 기준에 맞는 사람을 만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 어플에 시간을 쏟아붓다 보면 어느새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인내심과 변태 퇴치 능력까지 얻게 된다. 게다가 그렇게 어렵게 찾은 정상인(?) 친구는 얼마나 소중하던지... 거기에서 만난 친구 중에 아직까지 연락하는 친구만 다섯 명이 넘는다.
그중 베스는 첫인상부터 소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랜덤채팅에 올라오는 프로필 사진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제주 바다에서 플로깅(해변가에 있는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하고 있는 사진부터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들을 들고 찍은 사진까지, 예대에 다녔던 나와 취향은 물론 관심사까지 겹쳤다. 게다가 베스는 나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 그것도 한국말로! 내 랜덤채팅 4년 인생동안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많이 놀라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베스는 이미 한국인 특허, 꺾새 이모티콘까지 완벽하게 구사할만큼 엄청난 한국어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영어공부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베스가 영어로 말하고 싶으면 영어로 말해도 된다고 했는데, 외국인 중에 한국어 실력자는 거의 처음 봐서 그런지 신기하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생겨서 그냥 한국어로 대화하자고 했다. 베스는 4년 동안 한국에서 머물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저는 요즘 프랑스어도 공부하고 있어서 프랑스 음악을 많이 들어요."
한국어를 이렇게나 현지인처럼 할 수 있으면서 다른 언어를 더 배우고 있다니?! 베스는 진짜 천재구나, 싶었다. 사실 나도 언어에 관한 거라면 할 말이 많았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손댄 언어만 다섯 개였다. 그래서 그걸 잘하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내 대답은 '아니요'가 되겠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언어에 진심이었다. 언어를 잘하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이 났던가! 그런 내 열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 언어 실력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멍청한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언니가 언어 공부하는 방법을 옆에서 지켜보고 나니 언어 공부에 대한 내 시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노머 언니는 혼자서 즐겁게 언어를 터득하고 있었다. 내가 그걸 알게 된 것은 처음 언니 집에 초대되었을 때였다.
알록달록 내 예술 감각을 자극시키는 그림, 원룸을 가로지르는 길쭉한 조리대, 그 옆에 묵직하게 세워져 있는 냉장고. 베스는 조금 넓은 원룸에 살고 있었는데도 구석구석 자신만의 공간을 분리해서 꾸며놨다. 그중 내 시선이 오랫동안 머문 곳은 바로 미니 자석 칠판이었다. 냉장고 옆에 귀염뽀짝하게 붙어 있는 미니 자석 칠판에는 '오늘의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근육통이 심하다 : 어제 요가원에 처음 갔더니 근육통이 너무 심해요.
예문까지 야무지게 쓰여 있는 게 너무 귀여웠다. 밑에는 영한 번역 대회 일정까지 쓰여있었다.
베스의 집을 한 바퀴 비잉 둘러보니 여기저기 베스의 한국어 일상이 널려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매일 감사 한 줄'이라는 책이 있었고, 전자레인지 위에는 '하루 한 끼 밥해 먹기'라는 레시피 잡지가 펼쳐져 있었다. 요가매트 옆에는 언니가 직접 만든 요가 수련 단어 카드가 지퍼백 안에 얌전히 담겨 있었다. 곳곳에서 한국어 공부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저는 원래 공부하는 걸 좋아해요."
그녀는 드라마나 영화 속 같은 허구 세상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대사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어떻게 공부가 좋을 수가 있지? 어렴풋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대학이나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하기보단, 공부 그 자체를 즐겨라!'
하기야, 우리 엄마도 나에게 매일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거라고. 하지만 우리 엄마는 내가 그 문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엄마는 나에게 항상 '끝맺음'을 강조했다. 내가 중국어를 취미 삼아 공부할 때는 항상 자격증을 따라고 했고, 내가 운동을 하러 갈 때면 바디 프로필 사진 정도는 한번 찍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면, 나는 끝짱을 보지 못하는 책임감이 없는 아이로 결부되었다.
사실 중국어도 운동도 모두 취미로 시작했던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모두가 그렇듯 설레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특히 중국어를 배울 때는 조금 놀라울 지경이었다. 영어를 배울 때와는 다르게 내가 중국어를 배울 때는 콧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스스로 중국어 단어장을 만들어서 예쁘게 꾸미고 그날 배운 표현을 사용해서 일기도 쓰며 '중국어 배우기'에 애정을 쏟았다.
하지만 그건 몇 개월도 가지 못했다. 엄마는 나에게 중국어에 돈을 썼으니 그만큼의 값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자격증을 따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하는 척 강요했고, 나는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뒤로, 나는 더 이상 중국어를 애정할 수 없게 되었다. 시험에 나오는 중국어는 말 그대로 재미가 없었고, 내가 알고 싶은 영역의 언어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정제된 중국어 문장들과 내 관심사밖에 있는 주제들로 빽빽한 종이 시험지를 보면 중국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느느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베스는 어떻게 그렇게 언어를 즐길 수 있었던 걸까?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