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비합리적인 믿음에 근거하여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는 행위. 살아가면서 누구라도 한 번쯤 다른 대우를 받으며 불편한 감정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어떤 불편함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만, 어떤 불편함들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알아차리지 못하게 작동되고 있다. 원래 그래왔다는 이유로,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차별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 전, ‘평등과 차별’을 주제로 수업을 준비하면서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줄 만한 이야기를 생각해보다가 직접 경험한 차별을 떠올려봤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받는 차별이 성적에 의한 차별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성적에 의해서 차별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성적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일이 없다고 생각을 했다. 폭언이나 모욕을 당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야지 차별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평범했던 나의 학교생활에서는 차별은 없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도 누구나 겪었을 법한 차별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학업 성적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았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 (보다 분명한 표현으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그 외의 학생들은 그렇지 못한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선생님들의 호의적인 시선, 친구들 사이에서의 관계들처럼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차별은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은연중에 작동되는 것이기에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차별이 진행되기도 했다.
좋은 시설을 갖춘 제1 자습실은 전교 1등부터 30등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공간의 차별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그곳에 들어간 친구들은 개인용 독서실 책상과 개인용 사물함을 사용할 수 있었다. 31등부터 100등까지는 그보다는 못한 제2 자습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엔 개인용 책상은 있었지만, 사물함은 없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묘한 솜씨로 빚어낸 차별이었다. 그곳에도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은 교실에서 공부해야 했다.
1학기 중간고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나는 자랑스럽게 제1자습실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내 자리의 책상에 자습서와 문제지들을 꽂아놓으며 공부 좀 하는 학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그다음 시험부터는 제1 자습실에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학기 만에 자리를 빼야 했다.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 권한, 혜택의 차이는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신념 위에서 정당하게 행사되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얻어낸 성과이고 정당한 대우였다. 이런 생각은 성적이 좋지 못한 학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될 거야’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어떤 학생은 ‘나는 원래부터 교실에서 공부하는 게 좋아’라는 식으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성적에 따라서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구별짓는 것이 차별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정말 안타까운 점은 최근까지 그게 차별이라는 사실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 세상을 모른 채 살아간다. 설령 우물 밖에 나와서 드넓은 세상을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쉽게 살아오던 방식을 바꿀 수는 없다. 오히려 너무 넓은 세상에 겁먹고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어떤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 속에 맞춰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교라는 우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구조 속에서 자신을 맞춰 살아가고 자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사람은 개구리가 아니다. 차별을 몰랐던 사람이 차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우물 안에서만 살아가는 존재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