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교사로서의 마음가짐.
도덕 교사가 된 지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친구들은 이런 의문을 던진다.
“니가 어떻게 도덕 선생님이 됐냐?!”
그때마다 나는 국가에서 인정받은 몸이라고 반문을 펼치지만, 친구들의 의문이 이해는 간다. 친구들과 있을 때 나의 행실은 도덕적이라고 하기에는 쫌,,, 그렇다.
비슷한 이야기를 사촌 누나에게도 들은 경험이 있다. 누나의 중학교 도덕 선생님은 늘 학생들에게 존댓말로 이야기해 주시며 학생들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어 주는 그런 분이셨다고 한다. 한여름에도 긴 팔 셔츠를 차려입은 그 선생님이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닦아낼 때, 누나는 ‘아 저런 사람이 도덕 선생님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가 도덕 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니가 어떻게 도덕 선생님이 됐냐?!”라는 말을 선사해 주었다. 주변 사람들처럼 나도 정말 그런 생각이 종종 든다. “내가 어떻게 도덕 선생님이 됐을까?”
도덕 선생님이 되려면, 도덕 교사 자격증을 주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용 시험을 합격하면 된다. 나는 도덕 교사 자격증을 주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임용 시험에 합격해서 도덕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주변의 농담 섞인 한 마디를 들을 때면, 나는 아직 진정한 도덕 교사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떠오른다.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는 것이다. 그 자격에는 선생님이 체계화된 지식들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정도로 존경했던 이유는 지식 전달자의 역할을 넘어서 인격적인 성장을 돕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요즘 학교엔 스승은 없고, 공무원만 있다’라는 세간의 비판이 이를 증명한다. 스승, 즉 진정한 선생님이라면 주어진 업무만 하는 태도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훌륭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성 교육의 핵심 교과를 담당하는 도덕 교과의 선생님에게 훌륭한, 모범적인, 자애로운 모습들과 존경받을 만한 인격을 요구하는 주변의 검열과 압박은 당연한 일이다.
높은 수준의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문제를 뒤로 미뤄두더라도 도덕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의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 낸다면, 그 수업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 수업에서 이차방정식에 대해 배우고, 학생이 이차방정식 문제를 풀 수 있게 된다면 수학 수업은 목표를 달성한다. 영어 수업에서 to 부정사의 용법에 대해 배우고, 이를 활용해 문장을 해석할 수 있거나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영어 수업 역시 목표를 달성한다. 도덕 수업에서 폭력의 문제점과 예방법에 대해서 배운다. 이를 통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폭력을 예방할 수 있으면 성공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다음 시간에 친구와 싸워서 교무실로 불려 오는 경우도 발생한다.
도덕 수업은 측정 불가능한 성질의 것들을 목표로 삼고 있다. 도덕 교과에서 단순한 지식의 전달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너무나 단순한 명제들은 그것들이 가지는 당위와는 무관하게 설득력을 잃어버린다. ‘폭력을 사용하는 일은 잘못되었다’라는 사실은 학생들도 이미 알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굳이 다시 수업에서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즉, 도덕 교과의 목표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 지식을 아는 것을 넘어,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즉, 그러한 지식들이 자신의 행동, 성향과 일치하도록 이루어져야 비로소 ‘도덕 수업이 성공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덕적 성숙의 과정과 결과는 관찰하기 매우 어렵다.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하는 일은 얼마나 고달픈가.
한 학기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에게 ‘도덕 시간에 기억에 남는 게 뭐였니?’라고 물었다. ‘딱히 없는데요’, ‘기억 안 나요’라는 대답을 참 많이 듣게 되었다. 한 학기 동안 참 많은 일들을 겪었을 학생들 입장은 이해가 되지만, 교사로서 참 많은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다. 도덕 교사로서 잘하고 있나, 도덕을 가르치는 게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가 힘든 이유는 학생들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사가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도 학생들 때문이다. 회의감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꺼내 준 것은 어느 학생과의 기억이었다. 그 학생은 흔히 말하는 문제아였다. 수업 시간에 불성실한 태도는 기본이고, 학생부에 수시로 불려 다녔으며, 심지어는 담임 선생님에게 욕설도 서슴없이 내뱉어 그 학년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혀있는 학생이었다.
교사가 된 나에게 처음 감동을 준 학생이 바로 그 아이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는 때에 나에게 쭈뼛쭈뼛 다가왔다. 바로 그 학생이었다. 머뭇거리며 음료수 두 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며 겸연쩍은 목소리로, ‘이거는 내 꺼, 이거는 선생님 꺼’하며 나에게 음료수 하나를 건네주었다. 뜬금없는 선물에 ‘이거 뭐야?’하고 물었다. ‘선물이에요’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다시 ‘왜?’라고 되물었다. ‘선생님이 잘해주셨잖아요.’라고 짧은 대답을 해줬다. 마음에 큰 파도가 일렁였다. 사실 나는 그 학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 반에서의 수업도 힘들었고, 딱히 특별하게 잘해주지도 않았다. 나의 어떤 모습과 행동이 유난히 힘들었던 그 반에서, 그 아이에게 선물을 준비하게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내게는 잊히지 않는 경험으로 남아있다. 그 음료수는 고맙다는 말과 친구와 나누어 먹으라는 말과 함께 다시 돌려줬다. 그보다 더 값진 걸 받았으니 상관없었다.
“한 사람의 가슴에 도덕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우리들의 윤리학, 박찬구, p.305)
나는 그 학생에게 어떤 확신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런 믿음. 희미하게나마 나아갈 길이 보였다. 조급함을 거둘 필요를 느꼈다. 단숨에 사람이 변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도덕 교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업의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는 일이다. 다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할 뿐이다.
‘학창 시절에 도덕 시간에 무엇을 배웠나요?’라는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도 그렇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배운 내용보다도 그때의 분위기나 감정들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희미하게 남아있는 부스러기 들일지도 모른다. 한 번의 수업, 한 명의 교사로 학생의 인생이 바뀌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다만 좁은 아스팔트 틈에서 민들레가 피어나듯이, 그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사랑이 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하겠다. 조바심과 욕심을 덜어내고, 너른 마음으로 학생들의 어느 한 편에 아름다운 부스러기들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