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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Nov 30. 2021

머리카락-코로나19에 대한 단상(1)

생활기록지  20200805

 코로나19로 인한 휴교령이 시작된 지 두 달 째에 접어들었다. 모두들 집안에서 북덕거리며 지내는 터라 공기에 먼지가 가득하다. 햇빛이 잘 들지않는 집안은 약간 우울한 느낌마저 든다. 언젠가부터 주변에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게 자주 눈에 띄였다. 얼른 빗자루를 들어 쓸어 모아보면 항상 수북이 머리카락이 달려 나온다. 그 길이를 보아 하면 내 것이 분명한데 언제 이렇게 많이 빠진건지... 어깨를 넘은 긴 내 머리카락은 진작에, 마치 18세기 여자들처럼 전체를 꼼꼼히 둘러 쫑쫑 땋아 묶여있었다. 이렇게까지 빡빡하게 땋아 내린 머릿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뭉텅이로 빠질 수 있는건지. 이 정도면 거의 탈모 급이지 않은가. 

 새로 머리를 감고 말린 후, 앉은 자리에서 다 마른 머리를 빗어내려 촘촘히 온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섞어가며 절대로 빠뜨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꼼꼼히 땋아 내린다. 전체를 둘러 내리고 나면 땋은 머리를 한번에 동그랗게 돌돌 말아 고무줄로 챙챙 묶는다. 머리를 다 묶고 난 뒤엔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과 어깨와 옷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모은다. 한 웅큼씩 나오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쓱쓱 뭉쳐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주변에 떨어진 것이 없나 다시 한번 확인한다. 거울을 보면 쭉 찢어져 달려 올라간 눈매가 참 못났다. 당긴 김에 주름이나 좀 사라지면 좋겠건만 그건 여전하니 입 주변에 매달려 있어 슬그머니 거울 앞에서 물러나버렸다.



  둘째 아들이 머리카락을 길러 소아암환우를 위한 가발 기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이는 앞머리만 삐죽이 있는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기부에 필요한 길이까지 기르는 데는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남자아이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에는 예상했던 것 보다 더 강력한 사회 통념의 부정적 압박이 올려졌다. 아이에게 직접 건네는 성차별적 압력과 놀림, 부모인 나에게 가해지는 이른바 ‘교육적인 충고’들이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었다. 주변만 문제로 끝나진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의 산발이 된 지저분한 머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누가 봐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땀 범벅 된 수세뭉치 머리카락을 보며 하루에도 열두번 생각이 바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는 뜻밖에도 상당히 잘 버티어 주었다. 누군가가 놀리면 외면했고, 지저분한 상태는 개의치 않았다. 길이가 점점 길어져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아이를 ‘she’로 지칭할 무렵엔 자신의 머리카락에 상당한 애착까지 갖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드디어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을 만큼 길었을 때, 나에게는 또다른 고민이 생겨났다. 아이에게 생겨난 긴 머리에 대한 애정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좀더 길게 내버려둬도 좋지않을까.. 고민 끝에 결국 이발의 날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나의 우려도 빗나가지 않았다. 겨우 미용실에 아이를 달래 앉혀 놓았지만, 날선 차가운 은색 가위에 서걱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을 때, 아이는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목놓아 울었다. 그 동굴 같은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울어대는 아이가 어찌나 안쓰러운지..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치는 기분 좋은 보드라움을 좋아하던 아이의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 아홉살 아이에게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기쁨보다도 당장 내가 좋아하고 정들었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슬픔이 더 크게 와 닿았을 지도 모른다. 둘째 아들은 이 일을 통해 상당히 빠른 나이에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취향을 알게 된 것 같다. 몇 시간 동안 눈과 목이 퉁퉁 붓도록 울며 머리카락과 이별의 인사를 했던 아이는 얼마 뒤, 다시 머리를 기르겠다고 선언했다. 



 요즘 굴러다니는 나의 머리카락들을 보면 아이가 걸린 2년의 시간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빠지는 머리카락들 한달만 모아도 그것만으로 가발 하나를 거뜬히 만들고도 남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시 한번 빗자루를 들어 주변을 쓸어본다. 또 어디선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뭉쳐서 흘러나온다. 한숨이 나왔다. 플라스틱 빗자루의 바닥에는 머리카락과 먼지들이 뒤엉켜 잘 떨어져 나오지도 않고 깨끗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빗자루에서 먼지가 떨어져 더 지저분해 지는 것처럼 보인다. 

 걸레질도 만만치 않다. 머리카락이 있을 때 바닥과 물걸레질은 정말 상극이다. 걸레에 들러붙었다가 다시 밀려나오면서 고집스럽게 표면에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 대야에 걸레를 빨아보지만 어디엔가 휩쓸린 머리카락들은 깨끗하게 씻겨 나오지도 않고 숨어있다가 바닥을 닦을 때만 다시 나오는 것이다. 



 쓸고 닦다 보니 금방 식사시간이 되었다. 온라인수업을 하는 아이들의 시간표에 맞춰주려 급하게 이것저것을 볶아 아이들에게 점심상을 차려주었다. 아이가 재잘대며 밥을 먹다가 ‘어, 엄마 머리카락 또 하나 발견했어. 내가 눈이 좋지?’라고 해맑게 말을 붙인다. 슬며시 짜증이 솟아올랐다. 머리카락이 거기서도 나오다니. 요리를 하면서도 앞치마를 입고 피부가 당겨라 머리를 땋아 올린 채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소리를 높였다. 


‘그런 건 그만 말해.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올 수도 있지’ 


 누구를 향한 짜증인지 알 수가 없다. 집안에만 틀어박힌 채 지낸 지는 2개월 반이 되어간다. 아이들의 휴교령은 더 길어진다라는 발표가 있었다. 솔직히 올해가 지날 때까지 이 휴교령이 풀린다 라는 보장이 없다. 저녁 7시부터는 모든 통행이 금지된다. 현지의 의료시스템은 전혀 믿을 수가 없다. 차이나 코로나 너네 나라로 가!라는 말을 듣고는 손이 벌벌 떨려 17년째 살고 있던 남의 나라 셋방살이가 잠시 허무하기도 했었다. 

걱정이 많은 나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보다가 두려워져서 외부 생활에 대한 완전 폐쇄 모드에 돌입했다. 모든 생활이 바뀌었다. 바깥세상의 햇빛은 찬란하지만 집 안으로의 한줄기 빛조차도 귀한 상황이다. 마치 TV 속에 있는 다른 세상의 풍경을 보는 것 마냥 유리창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간이 어디쯤 흘러 가는지 알 수 없다. 당연히 생업에 미친 영향도 쉽지는 않았다. 손님들은 줄어 들었고 우리는 불안해졌다. 특수한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생활에 오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아 안기는 쉽지않다. 약간의 세도 깎아줄 수가 없다는 집주인의 단호한 레터는 더욱더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자신들에게도 오직 단 하나의 수입이라던 집주인은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지고 있는 부동산 업자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세상이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던 아니던 결국은 같은 것은 같은 것이다. 점점 마음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더욱더 무거워질 뿐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늪과 같다. 더 빠져들고 캄캄해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한다.



 하아~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내지른 소리가 미안했다. 달각달각 그릇을 치우고 다시 빗자루를 들고 하다만 청소를 시작했다. 꼼꼼히, 꼼꼼히. 마치 세상에 머리카락은 한 올이라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앨 모양으로 바닥을 쓸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머리를 묶어 올렸다. 시간은 지나가고 빠진 머리카락이 자라듯이 언젠가는 이 시간도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청소를 한다. 바깥의 햇빛은 언젠가는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거실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바램을 담아 가득 연 창문에서 시원한 바깥 공기가 흘러 들어 온다. 그리고 안의 내부를 바꾸어 낸다. 괜찮다. 괜찮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끝나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 되지.. 또 새로운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이 있을 것이다. 살아나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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