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기록지 20210414
심장의 뻐근한 통증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아직 어두컴컴한 고요함에 싸여 있었다. 새들조차 지저귀지 않는 시간. 주변을 더듬어 버튼을 누르자 전자기기의 날카로운 빛이 4시 12분의 숫자를 쏘아 내었다. 아직 많이 이른 시간이지만 뭉근하게 퍼져나가는 압통에 다시 잠들긴 힘들 것 같던 그녀는 눕기를 포기하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여느 때 보다도 정신이 쨍하게 맑은 상태였다.
‘일단 애들 학교 파일들을 다시 확인해보고 순서대로 정리를 해놓는게 좋겠다. 성적표랑 상장, 레터들… 그리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야겠지…. …뭐라고 해야할까…’
순간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슬픔. 아픔? 미안함.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며칠 전부터 가슴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벌컥거리는 두근거림으로 시작된 이상은 조금만 움직여도 귀를 때리는 듯한 격한 박동과 통증으로 심해지더니 곧 왼쪽 어깨와 팔까지 뻣뻣한 저림이 번져나갔다. 누워있는 것도 용이하진 않았다. 목구멍에 뭐가 걸린듯한 이물감에 머리를 낮추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숨이 차면서 심장박동이 120을 넘어갈 때, 그녀는 불현듯 이러다간 잠이 든 사이에 심장이 멈춰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자 가슴이 통증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꽉 죄이면서 아이들의 얼굴이 차올랐다. 아직 아이들은 너무 어린데… 만약을 위해서도 급하게 해놓아야 할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은 삶에 대한 정리는 스스로에 대한 가벼운 한심함을 제외하고는 별게 없었다. 아직도 정리못한 처박아놓은 과거의 짐들, 별 내용 없이 끄적여 놓은 우스꽝스러운 미완성 글들, 괜히 찝찝한 인터넷 검색기록, 찢어지고 구멍났어도 그냥 입고있던 속옷… 그리고 밍기적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내다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결국 끝나버릴지도 모르는 그녀의 인생… 스믈스믈 흘러나오는 스스로에 대한 생각은 짧고도 하찮았다. 이런 것들은 얼른 버려버리면 되는 것들이었다. 이런 찰나의 아쉬움은 금방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
마음이 어딘가 아득하게 쿵하고 떨어졌다. 몸체의 심장도 괴롭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엄마 없는 생을 산다는건 어린 아이들에겐 괴롭고 가혹한 일이다. 두려움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가 느끼는 통증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몸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눕지도 서지도 못하고 그녀는 붓고 저려서 잘 굽어지지 않는 손을 꾸왁 끌어다가 세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툭 하고 물기 어린 무언가가 떨어진 것도 같았다.
아이들의 파일을 다 정리하고 난 뒤 그녀는 편지를 쓰기 위해 생각을 가다듬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의 글을 써야할까 생각해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부모가 아이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무엇인가보다 평생에 새겨질 함께한 시간밖에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어떤 추억을 만들었던가.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행복한 기억을 쌓아왔던가? 우리는 행복했었나? 아이들은 무엇을 기억하게 될까. 그녀는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편지를 써 놓아야 할까. 애들 아빠가 있으니까… 내가 없으면 어쩌면 아이들은 외가 가족들과 멀어질 수도 있겠구나.’ 아이들의 상실이 생각보다 더 클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간다면 조금 더 아이들을 단단하게, 평생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강한 행복을, 도움을, 사랑을 주리라.
상태가 좋아지지 않은 채로 일상은 흘러갔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행동들을 알려주었다. 다행하게도 집 바로 앞과 주변으로 병원이 3군데나 있었다. 아이들은 극진했다. 예민한 작은 아이는 주변을 맴돌며 계속 무언가를 도우려고 했고 수더분한 큰아이도 애를 쓰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그녀를 더 슬프게 했다. 아이들이 안쓰러워 한번씩 더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엄마에 대한 공손함은 별개로 아이들은 서로 다투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번개같이 달려와 등을 두드리며 “엄마 물드릴까요. 따뜻한 물이에요”하고 컵을 들이밀었다. 엄마는 자야 된다고 계속 다독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무언가 마음은 있는데 행동이 어리숙한 큰아이의 어설픔이 마음에 걸렸다. 버석하게 서있는 아이가 그녀없이 누구에게 무조건의 애정을 받을 수 있을까. 갈데 없는 걱정에 마음이 아려왔다.
몸이 아파도 집안일은 계속 되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일상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벌떡대는 가슴을 움켜쥐고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했고, 축축히 젖은 앞섶을 잡으며 왜 항상 배가 이렇게 젖어버릴까 따위의 생각을 했다. 행주를 빨아 탁탁 털면서 이런 상태에서도 누군가를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어야 하다니… 가볍게 투덜대다가 또 청소기를 집어 든다. 몸을 움직이면서는 오히려 숨쉬는 것은 편했기 때문에 이리저리 청소를 하곤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 온몸을 울리며 뛰고 있는 심장이 조금이라도 진정되기를 잠시 기다렸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이의 버켓 리스트라던가 하는 바램은 그다지 욕망되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인지 단지 급하게 먼저 해 놓아야 하는 일들만 떠올랐고 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단연 아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차츰 은행 명의에 대한 생각과 아이들의 아빠, 그녀의 남편에 대한 당부 내지는 설명이 필요한 일들에 대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남편에게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의지함 고마움 안스러움 든든함 물론 약간의 서운함까지 어우러져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이 일 앞에서는 담담한 마음 뿐이었다.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슬퍼할 것이다.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생의 자립력을 가지고 있는 어른인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설명해야 할 혹은 해결해야할 일들의 목록을 생각하며 문득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재혼은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하던 애인을 만들건 상관없어, 아이들 성년이 될 때까지 결혼은 하지 말아줘.’ 이것이 아이들이 혹여나 집에서 소외될까를 오롯이 걱정한것인지, 아이들에게 엄마의 자리를 잃기 싫은 그녀의 욕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외로 남편에게 다른 누군가가 생기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배신’하는 행동이 싫었던 모양이라고 그녀는 평소의 스스로의 감정을 납득했다.
부모님께는 아프다는 것을 알려야 할까 이대로 지나갈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일이 닥칠 수도 있다. 아무도 앞일을 알 수 없는 것이다. 평소에도 다 앓고 지나가면 이야기를 전하던 그녀는 순간 서러움이 덮쳐 당장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프다고 아프다고 징징대고 싶었다. 위로가 필요했다. 단지 받아줄 위로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상처없는 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가슴을 꽉 채우며 비대해진 심장이 위아래로 펄떡대고 있었다. 점점 말을 하기가 싫어졌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처럼 가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안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영화를 보았다. 함께 앉아 책을 읽었다. 빛이 들어오는 창가 앞에 이불을 깔고 햇빛에 온기로 따끈해진 바닥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아이들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의식적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의 체온이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