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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May 15. 2020

여름산의 축제 (2)

생활기록지 20200304

-2-


 달각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의 바람은 그닥 시원하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나니 오히려 포기가 되었다. 아버님이 쓰시던 공간은 단촐했다. 당신의 서랍장, 벽장.. 그 속에는 세월을 간직한 물건들이 주인을 잃고 그래서 빛을 잃고 남겨져 있었다. “다 버려라. 그냥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어야지 뭐.. “ 왠지 버리라고 말하는 사람의 손을 타게 하기 싫어 서둘러 서랍장을 맡았다. 자그마한 단이 달린 서랍장은 낡고 먼지가 쌓여 있지만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슬쩍 손으로 이것저것 쓸어보았다. 이국적 모양과 조각의 담배 파이프들, 서예지, 잘 닦여진 낚싯대… 그러다가 서예함 사이에 단정히 넣어져 있던 아버님의 부모님, 그러니까 남편 조부모님의 낡고 빛 바랜 신분증을 발견하는 순간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이 속에 수십년 담겨있던 것은 그리움일까 시간일까

 당신만의 색채 가득한 물감들이 그린 다양한 그림의 흔적들이 이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묻혀 서글픔만 남겼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리해서 분리수거를 하고 수거함에 넣고 결국 이렇게 사라지는 시간이구나. 어디에도 남겨놓지 못한 그 그림은 혹은 나의 그림은..  남겨진 사람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시간과 역사를 알지 못하니 뭐라고 말 붙이기도 어려웠지만 이후의 선택이 기억하기 위한, 간직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면 덜 서글펐을까 생각해본다. 온통 땀으로 덮인 얼굴에서 안경이 자꾸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낑낑거리며 책도 쓰레기봉투도 묶어 들고 분리수거함으로 들고 갔다. 산바람이 불어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닿자 안경코로 쓸려 내린 피부가 따끔따끔 거렸다. 그것이 다였다. 그렇게 누군가의 방은 비어 버렸다.


 엄마는 내 남편을 위로하며 반울음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 없으면 하루도 못 지낸다. 건강 하자 건강해야 해..”  두 분이 가장 치열하게 부딪히며 지내던 무렵을 생생히 기억하는 나로썬 애닯게 들리는 엄마의 저 말씀이 40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 두드리고 깨지며 만들어진 두 사람의 관계라는 것을 안다.  “부부가 제일이다. 서로 자존심 상할 말 하지 말고, 둘이 의지하고 둘이 사이 좋게 지내라 나중에 남는 건 너거 둘밖에 없다..” 엄마의 계속되는 당부에 순간 자신을 잃었다. 남편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네..그래야죠.. 대답했다. 나는 당신을 꽃피울 수 있을까 당신이 내게로 와 빛 바랜 드라이플라워로 아무것도 남기지않고 사라져 버리길 나는 바라지않는다. 당장 저 표정 속에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방법을 모르겠다.




 여름비도 내린 터라 산소 앞으로 가는 길도 수북하게 잡풀이 자라있었다. 두 남자들은 낫으로 쓱쓱 길을 내고 풀들을 쳐냈다. 드디어 아버님 산소 앞에 선 순간 나도 모르게 짧게 탄성이 나왔다. 아버님의 무덤은 작은 축제가 일어난 것 같았다! 무성히 가히 나무라 불리워도 될 나무와 풀들이 가득 우거져 싱싱하게 자라 올라와 있었다. 그 모습이 서글프거나 음침해보이지 않고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반짝거리는 빛살까지 깔깔대며 튕겨 오르는 즐거운 소란스러움이 거기에 있었다. 흥겹고 어울리는 것 좋아하시던 분이 지금도 외롭진 않으신 것 같아요.. 눈부신 빛의 입자가 나뭇잎들에 부딪혀 함께 빛나고 있다.


 아버님의 두 아들이 풀을 뽑고 산소를 정리하는 동안 다른 가족들은 단을 치우고 상을 차렸다. 아이들도 나서서 일손을 도와 제법 대견하게 뽑힌 풀들을 정리하며 이리저리 한 몫씩을 한다. 과일들이 하나씩 올라가고 차례로 돌아가면서 술도 올렸다. 아버님의 아들들 그 아내, 아이들 각자의 그림을 그리고 살아가지만 이 또한 당신의 물감 몇 방울 혹은 당신의 그림 조각.. 아이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Bye~ 다음에 또 만나요.


 산을 다시 내려오는 길은 수월했다.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한국도 오랜만에 나왔는데 낙산사 쪽 들러서 한번 둘러보고 가자. 그래 동서 거기서 밥 먹고 바람 쐬고 가. 다시 대관령 도로를 타고 달리면서 아이들은 창문을 열고 도로에 걸린 구름 속을 신나게 즐겼다. 깔깔거리며 흥분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덩달아 웃음 짓게 한다. 길게 웃음을 빼물고 있을 때 남편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 함께 가시지 않으셨던 분은 식사를 챙겨 하시라는 말씀에 쓸쓸함을 진하게 담고 그래.. 알았다. 운전 조심하고.. 그럼 오늘은 들어오냐 하신다. 그 시든 듯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담담히 내 쪽 창문을 내렸다.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차에서 창문을 끝까지 내린 채로 바람이 한바탕 차안을 남편을 두 아이를, 나를 휩쓸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의 후덥지근 쌓여있던 공기가 청량해지고 있었다. 나의 외로움을 이해 받지는 못하더라도 내 가족에게 위로 받을 수 있길, 그런 관계를 쌓아 가길 바란다. 아직은 어린 나의 아이들과 남편을 바라보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구름을 싣고 넘나들던 산바람이 금방 찝찔한 바닷바람으로 바뀌었다. 한국의 바다 냄새다. 정겹고도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 눈에 가득 차 올랐다. 아마 우리 아이들에겐 새로운 세상의 기억이 되어지겠지.. 아이들의 첫번째 세상인 엄마 아빠와 함께 남긴 흔적. 이 아이들이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살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낯선 곳으로의 가족과 함께한 나들이 정도로 기억할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물감 한 방울이 너와 내가 섞여서 그려졌다는 것이다. 네 그림 속에도 우리가 있다. 그것으로 되었다.

적도의 평원으로, 우리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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