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타임머신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던가, 내가 이런 걸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오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에서 그때의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비단 사진뿐이겠는가. 무심코 걷던 길 어귀에서 코 끝을 스친 어떤 향기, 우연히 들은 노래 한 소절에, 우리의 기억은 타임머신을 탄 듯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로 순간 이동한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억들을 저장하고 있는 것 같다.
가을이 왔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 가을이다. 선선한 바람과 높다란 하늘, 오색찬란한 자연의 색채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감동이 밀려온다. 그리고 내가 가을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
바로 금목서 나무와 꽃이다. 짙은 초록색 나무에 작고 앙증맞은 주황색 꽃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금목서 나무는 만리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름처럼 이 꽃의 향기는 정말 멀리에서도 맡을 수 있어서 동네 어귀에 이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오가는 길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원래도 이 향기를 좋아했지만 정말 더 사랑하게 된 이유는 남편과의 러브스토리에 있다. 남편과 9월에 처음 만나 한창 사랑이 꽃피던 그 시절, 저녁에 헤어지기 아쉬워 손을 잡고 거닐던 그 길가에 금목서 나무가 있었다. 그래서 이 향기를 맡을 때면 나는 그 장소, 그 시간으로 돌아가 설레는 마음을 가진 나를 기억해 내는 것이다. 코 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가 10여 년 전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때 맞잡은 손의 따스한 온기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재미있었던, 서로에게 흠뻑 빠져있던, 그 달콤한 순간을 다시 느낀다. 지금은 설렘보다는 편안함으로 살고 있기에 그때의 기억이 소환되면,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더니 결국 삶이란 이런 거지, 하며 변해버린 우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싸이월드에서 도토리를 털어 구매했던 노래들을 들으면, 노는 게 제일 좋았던 20대의 나를 만나게 되고 그때의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고만고만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가는 엄마를 보면, 30대의 내가 육아하느라 고군분투했던 시절이 생각나고 아이들의 어릴 적 그 모습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40대를 보내고 있는 지금, 나는 어떤 것으로 오늘의 기억을 소환하게 될까? 그리고 어떤 것을 그리워하게 될까?
미래로 가볼 수 있는 타임머신은 아직 없지만, 우리는 언제든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타임머신을 갖고 사는 것 같다. 설령 갑자기 소환된 그 기억이 아픔과 슬픔일지라도, 그 안에서 보석 같은 순간을 발견할 수 있길. 그때는 어렸고, 약했고, 미숙했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쳤던 선물을 지금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얼른 금목서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올해에는 꼭, 남편과 금목서 꽃향기를 맡으며 거닐어볼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