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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하 Jun 23. 2022

비 오는 날, 사진전시회 가다

노순택, <사진의 털> 전시를 보고, 비를 맞고.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체육시간이 미치게 싫었던 어린 시절도 아닌데 올 듯 말 듯 오지 않는 비를 얼마나 기다렸던지. 며칠 동안은 아침마다 구글 홈스피커에 "헤이 구글, 오늘도 비 안 와?" 묻고, "네~ 오늘도 서울지방에 비는 오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으며 방문을 나서곤 했었다.


비를 그리 기다리게 된 것에는 앞 집 공사현장의 영향도 있었다. 벌써 두어달째 이른 아침부터 들리는, 뼈를 울리는 무시무시한 소음이 - 공사하는 분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 비가 오면 뚝 그치니까. 세상이 그렇게도 참 쉽게 평화로워지는 것만 같으니까.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냥 마음이 답답했던 것이었다. 비 오기 직전의 잔뜩 찌푸린,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며칠간 계속되는 것이.  할 말이 있는데 계속 주저하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비명을 질러야 할 것 같은데 속으로 막 삼키는 사람을 보는 것 마냥. 너 거기 잔뜩 물기를 머금고 있는 거 아는데, 얼마나 더 습기를 품어야 시원하게 내려줄 것이냐, 얼마나 엄청난 폭우로 쏟아지려고 그러는 것이냐~ 하고, (물론 속으로만) 하늘을 보며 묻고는 했었다.


그러므로 오늘, 마침내 시원스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간만의 시내(삼청동) 약속 장소로 나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머나먼 남쪽 지방에서 내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온 반가운 이를 만나는 길이니 더욱 경쾌한 나들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먹쉬돈나에서 떡볶이를 먹으며 기분 좋은 수다를 나눈 후에 학고재에 들러 역시 오랜만에 사진 전시를 보았다. 노순택 작가의 <사진의 털> 전이다.

http://www.hakgojae.com/page/1-3-view.php?exhibition_num=430


몇 차례 보아왔던 이전 전시들과 사뭇 달라진 전시의 풍경이 좋았다. 빼곡한 메시지를 담아내던 곳에 자리한 여백과 배치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열정적으로 쏟아온,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들을 던져왔던 '사진의 말들'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자유로움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도시를 떠나 먼 남해 끝에서 새롭게 일구고 있는 작가의 삶의 모습도 투영되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벽면의 텍스트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세부가 어둠에 묻혔다 해서, 세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깃털이 윤곽에 갇혔다 해서, 무게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가끔은 질문이 대답이 된다. "

- 작가노트 <검은 깃털> 중 



* 한족 끝에 자리한, 어떤 이의 실루엣에 잠시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참 많이 좋아했던, 지금은 그리운 이의 뒷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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