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하 Jun 07. 2022

속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이사 대신 경로 변경

집주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8월 중순에 끝나는 임대차 계약을 연장할지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이사를 나가겠다고 했다. 근래에 아침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다 보니 높은 언덕까지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어졌고, 빌라가 밀집해있는 동네의 연이은 재건축 공사로 인한 스트레스도 상당했던 것이 큰 이유였다. 특히 현재 바로 앞집에서 층수가 올라가고 있는 공사의 소음은 - 죄송하다며 들고 온 홍삼 스틱을 내 비록 잘 먹긴 했어도 -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사무실 근처로, 개발의 열기가 덜한 좀 더 낮은 곳으로 이사를 가자 맘을 먹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정은 곧 번복되었다.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기 시작하고 부동산에 전화를 해보자 곧 알아버린 것이다. 현재는 내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곳을 찾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을. 다시 전화를 해서 연장을 하겠다 하자 집주인은 "운동 삼아 다니기 좋은 곳" 아니냐며 반겼다. 경험상 나는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좋아하는, 이사를 나가게 되면 매우 아쉬워하는 세입자다.  


이사를 정말 많이 했다. 살면서 나보다 이사를 많이 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즐기는 것도 아니고 익숙해지지는 일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매번 이사를 하면서는, 도대체 왜 이 일에는 관성이 생기지 않는 것이냐 - 뭐 사는 일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 투덜거리며 씩씩거리며 온 몸의 에너지를 짜내어 이사를 하고는 몸살이 나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이사의 고단한 과정들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시뮬레이션해보는 것만으로도 결정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 이번엔 포기하고... 다음에 좀 더 나은 곳으로 가자...


그래도 아쉬움은 컸던지 계속 맥주 생각이 나는 건 해야  일들을 세며 을 수 있었지만(장하다!), 꼼짝없이 이년 간은 계속돼야 하는 출퇴근길에 대한 울적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퇴근길에서  가지 얄팍한 꾀가 떠올라 주었는데... 까치산역에 내려 집까지 걸어오던 경로를 바꿔서 화곡역에서 다녀보기로  것이다. 거리는 비슷하지만 조금  가파르고 인적이 드물어 피하던 길로 다니면서 이사를  것처럼 나를 달래고 속여보자는 .  

그리 맘을 먹고 조금은 새로워진 퇴근길을 노인네처럼 천천히     오르는데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생각만으로 정말 우습게도 마음이, 내딛는 발에 가해지는 중력이, 한결 가벼워지는  보면 나는 얼마나 단순한 인간인 것이냐....  


그럼에도 이 결정이 매우 마음에 든 나는, 흡족해진 기분으로, 이다지도 얄팍한 나 자신에게 다정히 속삭여주었다. '속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작가의 이전글 뜻밖의 여정에서 노년을 꿈꾸어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