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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하 Jun 26. 2022

고사리를 고사리라 말하지 못하고...

"보편적이고 경미한 유사성 장애"

멸치와 고사리와 밀랍이 택배로 왔다. 상자를 열자 직접 키워서 말렸다는 고사리의 향이 와락 달려 나와 후각신경을 자극한다. 동네 양봉일을 돕고 얻었다는 밀랍(맛과 향이 궁금하다 하니 보내준 ), 멸치 모두가 향기롭고 그 맛도 호사롭기 그지없다. 남해 끝 바닷가로 이사 갔다 들은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밭을 일구고 수확을 하고 동네 양봉을 돕고 라벤더 경작을 궁리하고 있다니, 이 부부의 친화력(사람에 대해서 뿐 아니라 땅, 자연, 세계, 많은 사물에 대한)이 참으로 놀랍다. 에센셜 오일 추출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는 중이라 하니, 당면한 관심사의 일치가 매우 반가워 오가는 문자가 수다스러워진다.


"근데 뭔 도라지향? ㅎㅎ"

"... ㅋㅋ 고사리요"


"고사리"를 "도라지" 라 말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듣는 이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도 대화에서 자꾸 고유명사가 사라지고... 이거 저거, 이 사람 저 사람으로 통화는 '대명사 질환 법'을 앓는 중"이라며 위로까지 보내주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섬세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 고사리와 도라지가 하루 종일 생각이 났다. 한 자도 안 겹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하게 들리지? 하고. 써놓고 비교해보니 모음이 모두 같고, 자음 ㄹ이 둘 다 들어가긴 했네... 

어디선가 '유사성 장애'와 노화에 대해 읽었던 것도 생각났다. 실어증에 대한 야콥슨의 개념을 빌려, 노화에 따라 유사성 장애에서 인접성 장애의 방향으로 언어 장애가 진행되다고 했었지... 


다행히도 책 제목이 생각나 찾아보았다.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서영인 글, 보담 그림)이다. 무려 문학평론가이며 번역가인 저자는 '선택의 축'이 망가져가서 이거 저거, 저기 거기 등으로 말하는 우리의 증상을 "보편적이고 경미한 유사성 장애"라 규정하고, 그렇게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유사성 장애 연대가 결성된다"고 유쾌한 농담처럼 말해준다. 그리고 유사성의 단계에서는 아직 기회가 있다고, "선명하고 날카롭고 적확한 단어를 선택할 수 없더라도 애매하고 희미한 단어들의 사이를 신중하게 더듬는, 애매하고 희미하므로 더욱 주의 깊게 결합의 맥락을 살피는 문체"를 가지자 말한다. 


"상대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어야 할 맥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전달되어야 할 문장들을 놓치지 않는 지혜에 대해 야콥슨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 냉정한 인문학자는 그건 그냥 기억력 감퇴와 전두엽 퇴화의 징후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을지도.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줄은 몰랐다. 바라는 것이 없어 이룬 것도 별로 없는 인생이지만 이 목표만은 가능한 늦게까지 지키고 싶다."

-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서영인 글, 보담 그림), 099쪽 


오늘의 내 징후가 보편적이고 경미한 것이라 말해준 저자에 감사를.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도 명심해두어야겠다. 

그런데 고사리와 도라지는 너무 비슷하지 않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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