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돌의 지혜 Jan 06. 2024

제자의 일터에 가보았다

처음으로 일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았을 때

(23년 7월에 쓴 글) 


 졸업한 제자가 교무실 책상에 '키자니아' 티켓을 두고 갔다. '키자니아'는 어린이들이 다양한 직업 체험을 할 수 있는 테마파크인데 제법 양질의 체험으로 인기가 많다. 얼마 전 스승의 날 학교에 찾아왔을 때 휴학하고 알바를 한다고 말하더니 이후 내 생각이 났는지 티켓을 사서 두고 갔다. 대학생한테 부담되는 가격이라 얼른 제자에게 연락해 티켓값을 보내주고 혹시 서운할까 싶어 바쁜 가운데 적지 않은 비용인데도 이렇게 선생님에게 마음 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매번 찾아오는 제자들은 참 신기하다. 내가 담임도 아니고, 나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나를 기억하고 꾸준히 찾아와준다. 이런 제자들을 볼 때마다 관계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도 방학을 한김에 일곱살 딸을 데리고 키자니아에 갔다. 평일임에도 엄청난 인파에 당황하며 작년에 분당 잡월드를 갔던 기억을 더듬어 체험을 해나갔다. 그런데 첫 직업 체험을 대기하는 줄에서 한 아이 엄마가 알바생에게 무례하게 구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미 먼저 도착해 대기하는 아이들에게 작은 사이즈옷들을 다 줘서 큰 사이즈 옷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불평 불만이 지나쳤다. 아랫사람 잡도리하듯 '내가 매년 오는 사람인데 이 일을 기억하겠다'며 협박조로 말을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을 뿐만 아니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일부러 내 딸아이에게 옆의 아이와 옷을 바꿔입겠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 엄마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알라는 눈빛으로. 본인도 민망한지 그 정도로 그치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그저 천진난만한 태도로 "쌤~ 저 알바해요! 놀러오세요! 애들이 엄청 귀엽고 예뻐서 일하는 게 재밌어요!"라고 말하던 제자의 얼굴이 어른거리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순간 소방체험 담당 알바생으로 아이들을 이끌고  소방차를 타고 지나가는 제자를 발견했다. 아직 이십대 초반인 제자가 나름 자기 생활비 벌어보겠다고 이렇게 사회에 나와 일을 하는구나. 제자의 일터에 들어서자마자 목격한 장면만 봐도 내게 말하지 않은 일하며 겪는 어려움들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 갔다. 대견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딸이 체험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 얼른 카페에 가서 음료를 종류별로 시켰다. 제자 것만 사려다가 아까 그 비상식적인  여자에게 수모를 당하고 얼굴이 빨개져 돌아간 알바생의 얼굴이 떠올라 여러 잔을 샀다. 이럴 때 돈 아끼지 않을 수 있도록 돈도 더 많이 벌고 싶단 생각도 스쳤다. 음료를 사들고 제자가 일하고 있는 부스에 찾아갔다. 제자는 깜짝 놀라며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내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날 수 있냐며 좋아했다.

  만나자마자 제자에게 말했다."Y야! 여기서 아이들 이끌며 일하는 모습 보니까 너무 멋지고 대단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너한테 함부로 대하는 사람 있으면 미친 사람이다 생각하고 주눅들지마~ 너 귀한 집 딸이고 샘의 귀한 제자니까!!! 알지?" 제자는 씩씩하게 웃으며 "아이 샘 걱정 마세요~ 힘든 일 없어요~"라고 말한다. 

  내가 처음 스무살이 되었을 때 생각했다. '이렇게 갑자기 어른이 되는 거라고?'하는 생각과 함께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기 전 스무살 1월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어른을 흉내내는 내가 낯설었다. 엄마는 '원래 어른은 갑자기 되는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어제 서이초 선생님을 추모하러 서초교육청에 다녀왔다. 그곳에 이런 쪽지가 있었다. '저는 교사는 아니지만 선생님과 같은 나이고 아직 대학생이에요. 우리는 어른이지만 아직 거센 세상을 감당하기엔 어린데 얼마나 힘드셨어요.' 그 쪽지가 떠올라 오늘 더 화가 나고 안쓰럽고 대견한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나보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나 살자고 남 못살게 구는 인생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살자. 나만큼 내 새끼만큼 내가 만나는 모든 남들도 누군가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다. 내가 쏜 화살이 세상에 돌고 돌아 내 자식한테 돌아올 수 있다는 무서운 진실을 나 역시 명심해야지. 서이초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일주일째 잠을 설치는 나날들이다. 

작가의 이전글 저는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