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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연 Jul 24. 2020

통역사의 몸값

공식 요율과 시장 요율에서의 끊이지 않는 딜레마

통역사라는 직업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연봉이다.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드물었던 과거에는 통역으로 번 돈으로 집, 차 심지어는 건물도 산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통역사라는 직업 자체가 어느 정도 경제적인 풍족함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통역사의 연봉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통역 요율’이다. 통역 당 얼마를 받는지를 알면 통역사의 수입을 대략적으로나마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요율이라는 것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 문제다.


각 통번역대학원에는 통번역센터가 있다. 통번역센터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일을 수주해서, 센터에 등록되어 있는 프리랜서들(주로 해당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일을 넘겨준다. 통번역센터에 고지된 통역 요율이 가장 ‘공식적’인 요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요율 역시 학교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필자가 졸업한 학교는 영어 통역 기준으로 순차/동시통역이 시간당 60만 원, 1시간 이상 6시간 미만은 90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또한 출장을 갈 경우 이동시간 보상비가 따로 있어 통역료 외에 별도로 30만 원(국내), 40만 원(해외)을 지급해야 하며, 출장 기간 내에 회의가 없을 경우에도 해당 보상비를 별도로 지급해야 한다. 물론, 열차표, 항공료나 숙박비는 모두 주최 측이 부담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기준만 보면, 졸업 후 연봉 1억 이상을 받는 것은 그리 요원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실제로 필자도 통번역대학원 입시 준비를 했을 당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매일 통역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달에 열 번만 통역을 해도 일반 직장인 월급 이상을 받을 수 있으니, 통번역대학원 졸업만 제대로 한다면 ‘먹고사니즘’과 영원히 이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달에 열 번 통역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임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졸업 후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우선, 갓 졸업한 병아리 통역사에게 공식 요율을 제공했던 에이전시도 없었을뿐더러 일 자체가 많지 않았다. 지금 막 학위를 딴 졸업생이 이렇다 할 통역 경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클라이언트는 통역사의 과거 이력을 바탕으로 통역을 수행할 수 있을지 여부를 가늠한다. 대학원을 졸업했다는 것 말고는 실력을 검증할 수 있는 트랙 레코드가 없으니, 업무에 지원해도 떨어지기 일쑤였고, 어쩌다 들어온 일은 공식 요율에 한 없이 못 미치는 일들 뿐이었다. 


그래도 요율에 벗어난 일들을 아예 받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큰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경력이 필요했고, 경력을 쌓으려면 지금 당장의 요율은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요율이라는 조건을 조금 놓고 나니, 결국엔 나 자신과의 합의선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공식 요율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말도 안 되는 요율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클라이언트 측의 완강한 요율 책정에 반기를 들지 못하고 들어오는 대로 일을 수용했던 시절도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한 첫 해가 그랬다. ‘통역 경력이 많지 않은 나를 써주는 것에 감사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업무에 임했어도, 일을 마치고 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프리랜서로 일을 막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순차 통역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다. 클라이언트는 본인이 할 수도 있는 수준의 정말 간단한 통역이라고 했고, 그 이유로 공식 요율의 1/3도 되지 않는 낮은 요율을 제시했다. 지나치게 낮은 요율이었지만, 당시에는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땅한 통역일을 수주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거의 처음 맡게 된 통역 업무였던 만큼 나를 통역사로 기용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던 차였다. 


익숙하지 않았던 IT분야 통역이었고, 실전 무대였던 만큼 망치지 않으려고 몇 날 며칠을 공부했다. 여러 회사의 소개 자료를 통역하는 자리였는데, 발표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예상을 할 수 없으니 긴장을 갖고 자료에 나와 있지 않은 정보까지 최대한 찾아내서 내용을 숙지했다. 연사들이 그동안 다른 발표 자리에서 언급했던 이야기들을 찾고, 해당 기업과 관련된 기사들을 숙지하고, 주력하고 있는 사업들과 전문 용어들을 정리하는데 일주일은 걸렸던 것 같다. 40분 남짓한 통역이었지만, 이 40분을 족히 10시간 넘게 투자를 한 셈이다.


열심히 준비했던 만큼 예상에 크게 빗나가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고, 첫 통역을 큰 문제없이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강조했던 정말 '쉽고 간단한' 통역은 절대 아니었다. 연사가 하는 농담을 바로 캐치해서 맥락에 맞게 적절하게 통역해야 했고,  무대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동안 백 명이 넘는 청중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은 통역의 난이도를 떠나 큰 심적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일을 끝낸 후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통역을 위해 내가 투자한 노력만큼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았나 생각해보니 내가 들인 노력에 대해 터무니도 없는 대가를 받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통역 준비를 위해 쓴 시간과 열정이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클라이언트가 제시한 요율에 동의를 했으니, 남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후에도 몇 번 비슷한 통역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땐 솔직하게 말하고 요율을 맞춰주지 않으면 일을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통역사가 한 번 통역을 하는데 짧게는 1시간 이내에서 길게는 8시간 이상까지도 소요되는 경우가 있다. 공식 요율만 생각하면 하루 당 최소 60만 원에서 많게는 100만 원 이상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만한 고소득 직종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매일 통역을 한다는 것을 불가능할뿐더러, 1시간 통역을 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이 최소 몇 시간에서 길게는 몇 주나 몇 달까지도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특히 전문 분야의 경우, 해당 행사에서 다루는 주제가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난도가 높은 전문 분야인 데다가, 통역사가 통역을 하는 대상인 연사는 평생 그 분야를 연구해온 저명한 전문가인 경우가 많다. 통역사 역시 해당 분야의 전공자가 아닌 이상, 전문가의 언어를 본인의 구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해당 지식을 단기간에 흡수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통역 1시간을 위해 투자한 시간을 요율로 나눴을 때는 최저 시급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요율이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통역을 최대한 완벽하게 수행하려면, 사전 준비가 필수다. 때로, 사전 준비가 필요 없는 경우의 통역은 보다 낮은 요율로 책정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간단한 대화조차도 최소한의 사전 정보는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의 대화인지, 지금까지의 히스토리는 어떠한지, A와 B의 입장이 어떠한지 등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어야 정확한 통역이 이루어질 수 있다. 다만, 수 일에 걸쳐 통역 준비를 할 필요가 없는 난이도의 통역인 경우는 요율이 다소 낮게 책정될 수도 있으나,  어느 정도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면 최소한 공식 요율에 준하는 정도로 요율 책정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통역사가 통역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행사 당일 통역 시작부터 종료 시점까지의 시간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1.n배 이상의 시간을 이미 투자한 셈이다. 


가끔 공식 요율보다 낮은 요율로 받는 프리랜서들을 향해 시장 질서를 파괴한다는 질타를 하는 경우도 있다.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프리랜서로서 힘든 시간을 보낸 필자 역시도 공식 요율보다 낮은 일들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었다. 그것조차 받지 않으면 생계가 곤란해지는 상황에서 고고한 자존심만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을 하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지키되, 요율이 높다고 생각하는 클라이언트에겐 최대한 잘 설명하고 설득시키는 방향으로 스스로의 합의점을 찾았다. 


지금 막 시작한 1년 차 프리랜서와 10년 차 프리랜서에게 같은 요율을 제공할 클라이언트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 막 프리랜서를 시작한 통번역사에게 꼭 공식 요율을 지키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연차에 따라 들어오는 일의 양과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시장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저가 입찰로 일을 수주하는 것 역시 장기적으로는 통번역 업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낮추고, 열심히 노력하는 통역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결국엔 전반적인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본인이 실력을 갖춘 통역사라는 확신이 있으면 요율을 낮추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결국, 실력에 확신이 없어 저가로 경쟁력을 추구하려는 프리랜서들이 시장을 장악하는 상황이 온다면, '통역사도 별 거 없더라' '통역 들어봤는데 생각보다 못하더라'라는 생각을 갖거나, 적정 요율을 했을 때 '이 정도 요율로 하시는 통역사 분들도 많으신데요?'라는 답변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 탄탄한 실력과 이에 맞는 몸값을 갖춘 성실한 사람들이 피해 보는 상황이 생기는 셈이다.  


이제 막 4년 차가 되려는 통역사의 입장에서 요율 문제는 여전히 복잡하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은 대부분의 통역이 화상회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기업에서는 월별 통역 건 수를 기준으로 월급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고, 시간당 금액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으며, 건 당 금액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로 통역 업무 자체가 급감한 상황에서 이미 책정된 요율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아마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내내 요율 문제는 계속 안고 가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통번역 시장이 굉장히 힘든 상황이라는 것과, 예전처럼 통역과 번역만으로 충분히 먹고살 만큼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때는 지났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혹시 과거의 필자처럼 부푼 꿈을 안고 통역사라는 직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미 수년의 경력을 갖춰 어느 정도 유명해진 통역사의 사례만을 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이미 시장에서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람들이 많고, 시장이 포화 상태인 만큼 대다수에게 통역 일이 골고루 돌아갈 정도로 일감이 많지 않다는 냉혹한 현실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시장 상황과, 요율 문제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가장 이상적인 결론은 공식 요율을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경력과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 요율을 깎으려는 클라이언트를 망설임 없이 거절할 수 있으며, 일몇 개를 거절한다 한 들 생계에 전혀 지장이 없는 현금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되는 일이겠다. 원하는 곳에 본인의 자리가 없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그곳에 이를 준비가 됐는가를 생각해보면 결국 모든 건 다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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